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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시노드

‘수용’이란 어휘가 주는 감정이 간단하지 않다. 걱정으로 뒤덮인 슬픔, 힘에 눌려 당하는 억압, 중요한 것을 강제로 빼앗기는 억울함, 그런 것들이 섞였다. 우리 작은 밭은 성당 마당에 계신 성모님이 보시기 좋은 방향과 거리에 있고, 성당 너머 다음 언덕엔 큰 밭이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에 감자를 심었다. 뜨거운 흙먼지가 싫었지만 누나들과 밭에 가는 즐거움은, 단조로운 풀밭 사이에 숨겨진 청량한 시냇물 같았다. 동홍천에서 끊긴 고속도로가 이어졌다. 세상 좋아졌다는 표현을 또 쓰자니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트림이 올라온다. 사실, 이 길을 타고 집에 간 적은 한번도 없다. 단지, 방학 중 사목파견 때문에 서석을 지나 내면까지 가서 한 겨울을 보낸 것과, 내린천 줄기를 따라 구룡령을 넘어 동해안에 갔던 것이 내..

나를 기억하시는 하느님

며칠 장맛비가 쏟아붓더니 잠수교가 물에 잠겼다. 아침에 간신히 건너왔는데 퇴근 길이 걱정된다. 방법이라곤 제3한강교를 넘어가는 것뿐인데, 그러려면 1호터널을 빠져나가는 것이 큰 걸림돌이다. 좌석버스라는 이름의 승합차가 있었다. 입석을 하면 천장이 머리를 눌러 꺾어버리는 작은 사이즈의 버스다. 입석 마저도 얼마를 기다려야 탈 수 있을지 앞이 캄캄하다. 장마철이면 겪는 불편이지만 인구유입이 늘면서 해마다 고통의 수준이 급상승한다. 사우나독을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온 몸이 흠뻑 젖은 것 말고도 목이 아파 똑바로 펼 수가 없다. 지나치게 풍성한 콩나물 시루 안에서 두시간을 바닥만 보고 서있던 탓이다. 강을 건너오자 마자, 체면이고 염치고 모두 팽개치고, 그 지옥을 탈출하는데 기를 썼다. 긴 여름 태양도 버티지 ..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토록 엄하고 폐쇄적인 신학교 안에서도 선배들이 들으면 놀라 넘어질 꿈 같은 일이 일어났다. 휴게실에 설치된 텔레비전이 촌놈들에겐 신기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만화가게에서 김일의 박치기를 보며 자란 문화인에 속한다. 우리에게 TV시청이 허락된 것은 일주일에 한번, 특정 프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게리슨 유격대」, 「타잔」 같은 옴니버스드라마가 정기시청 프로였지만, 국가대항 축구 결승전 같은 빅매치가 아주 드물게 교장신부님의 특별 관면에 따라 시청이 허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축구가 새 역사를 썼다. 아쉬움이 남지만 어린 선수들이 기특하다. 교장신부님이 운동하시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하긴 밤낮으로 그 넓은 신학교 곳곳을 다니시니 그만한 운동이 있을까? 그런 분 밑에서 자..

가난한 이들의 날

사제관과 식복사 아주머니가 사는 집 가운데 제법 넓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중앙을 지나서도 꽤나 긴 거리를 띄어 놓고, 정면에 가로 앉은 건물 안에는, 신부님의 차고와 창고가 한 지붕을 덮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못살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첫째 이유는, 그 마당에 매여 있던 늑대같은 녀석이 제공했다. 제 놈이 가장 많이 만난 열 사람 안에 내가 들 텐데, 도무지 친해질 기색이 없다. 할 수 없이 아주머니 집 뒤로 난 작은 길로 돌아가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은 신부님이 자동차를 수리하는 날이다. 어깨에 거는 멜빵이 달려있고, 가랑이가 갈라진 정비복을 입으셨다. 늘 입는 수단과는 위아래가 한통으로 된 옷이란 공통점이 있다. 정비를 위해 바닥에 파인 구덩이 아래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신다. 거기서 신부..

천주경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 아침이면, 내 가슴 속에 일렁이는 아주 특별한 물결이 있다. 어려서는 비가 오는 날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나의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는 9일 동안 미사 끝에 이 노래를 부르며 방학을 준비했다. 시험을 치르는 괴로움은, 집에 간다는 희망으로 가득 메워진 이 가락 속에 잠시 몸을 숨긴다. 이 노래의 악보는 늘 엄마의 얼굴로 채워져 있어, 가사에 담긴 뜻을 볼 틈이 없었다. 아홉 번만 꼽으면 될 손가락을 백 번도 더 헤아린다. 과자 부스러기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우리에게, 끼니는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오, 예수”를 부르던 날 점심만 그 중요한 식사의 의미가 사라진다. 내게만 남은 기억일까? 짐을 꾸려 나서는 마당 곳곳엔 어김없이 작고..

『본조르노 파파』 출간 안내

블로그에 실었던 글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여러분의 격려 덕분입니다. 독립출판으로 착하게 만든 것이라, 매일 읽어 주신 분들께 겸손한 가격에 드리고 싶습니다. 서점에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것에 따른 불편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정리된 주문방법을 참조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없음 2019.06.07

마지막으로 바친 기도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버스 뒷좌석에서 성가를 부르는 어린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가사가 약간씩 깨지지만 음정은 비교적 정확하다. 장례식장에서 발인하기 직전, 나와 함께 연도를 바치는 아내의 옆에 어린 조카가 붙어 앉아, 자기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아이가 혼자 위령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오늘 이 세상 떠난’(502번)을 다 부르고 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227번)를 다시 시작한다. 인터넷기반의 디지털 미디어가 넘쳐난다. 언론을 못 믿겠다는 불만의 기억이 제법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가 바뀌어도 정권이 뒤집혀도 그저 그 턱이지 싶다. 그 틈을 비집고 소식전달자들이 콩나물 시루에 가득하다. ..

순수한 바람

저녁 식사자리에서 농담으로 주고받은 말이 씨가 되었다. 비행기 타는 것이 귀찮다는 푸념으로부터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중고차를 사서 끌고 다니다가 돌아갈 때 팔아도 손해가 없겠다는 의견이 제일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술안주 역할은 톡톡히 했다. 코치를 타는 방안을 제치고 「암트랙」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자 마자, 우리는 새로운 계획의 첫 단추를 끼웠다. 내일 아침 출발하는 일정을 몇시간 앞두고 과감하게 바꾼 것이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항공권을 취소하고 기차표를 예약했다. 모험을 선택한 용사의 웃음을 밤하늘로 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광화문 앞을 지나가기로 계획된 자전거 행렬이 안국동에 이르렀다. 예상치도 못한 난감한 사태가 벌어졌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파출소에 잡혀 들어간 우리는 단체로 준비한 유..

깨어 있어라

밤바다가 전혀 조용하지 않다. 어디서 쏘는 것인지 굉장히 밝은 빛줄기가 세 개는 되나보다. 발전시설이 넉넉하지 않은 시절임에도 엄청난 양의 전기를 태워 소방차 물 쏘듯 하늘과 바다 속으로 쏟아 붓는다. 차분히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가거나, 시간을 정해 놓고 꼭 봐야 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정신 나간 놈 널뛰듯, 조자룡 헌 창 쓰듯 제멋대로 天宮과 海表 사이에서 휘둘러 댄다. 마루와 앞마당을 갈라주는 유리문을 통과한 빛이, 방과 마루의 경계를 정해 놓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온 식구가 필통 속 연필처럼 나란히 누워있는 우리집 방을 허락도 없이 훑고 나가버린다. 벽에 걸린 십자가는 천장 가운데로 순간 이동했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 밑에 걸린 예수성심 상본이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가 눈 깜..

항상 우리와 함께

엄하기로 말하자면 허신부님을 따를 분이 없다. 아랫집에 사는 우리에게 흘러내려오는 소문을 통해 들은 일화가 수북하다. 대신학교에는 ‘라틴과’라는 특별한 과정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는 학생들은 1년간 라틴어만 배워야했다. 신학생 대우는커녕 고등학생보다 더 어린애 취급을 당했다는 후일담이 참 다양하다. 교단에서 던진 분필이 책상 위의 병을 맞춰 잉크를 뒤집어썼다거나, 분에 못 이겨 찬 교탁에 발이 끼인 신부님을, 모두가 달려들어 빼 드린 이야기가 증언집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안용지’라는 것을 처음 봤다. 아무리 입사한지 일주일 된 풋내기라는 것을 감안해도, 원고지 두 장 분량의 내용을 완성하는데 하루가 걸린 것은 너무했다. 그 정도의 글을 라틴어로 쓰라 했어도 그닷하진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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