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가난한 이들의 날

MonteLuca12 2019. 6. 15. 21:09

 

사제관과 식복사 아주머니가 사는 집 가운데 제법 넓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중앙을 지나서도 꽤나 긴 거리를 띄어 놓고, 정면에 가로 앉은 건물 안에는, 신부님의 차고와 창고가 한 지붕을 덮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못살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첫째 이유는, 그 마당에 매여 있던 늑대같은 녀석이 제공했다. 제 놈이 가장 많이 만난 열 사람 안에 내가 들 텐데, 도무지 친해질 기색이 없다. 할 수 없이 아주머니 집 뒤로 난 작은 길로 돌아가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은 신부님이 자동차를 수리하는 날이다. 어깨에 거는 멜빵이 달려있고, 가랑이가 갈라진 정비복을 입으셨다. 늘 입는 수단과는 위아래가 한통으로 된 옷이란 공통점이 있다. 정비를 위해 바닥에 파인 구덩이 아래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신다. 거기서 신부님은 자동차 밑을 올려다보며 엔진 오일을 갈고, 구리스를 곳곳에 주입하신다. 생전 처음 보는 공구를 가지고 당신 차를 직접 고치는 신부님이, 제대 위의 그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신부님이 미사 때마다 입는 개두포, 장백의, 영대, , 제의 모두에 내 세포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도와드릴 게 하나도 없다.

 

나는 기계치다. 젊어서는 모르고 살아왔는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니 적지 않은 핸디캡이 됐다. 전기는 감전이 무섭고 통신은 갈래가 복잡하다. 휘두르는 망치는 헛방질이 일쑤고, 나사못은 돌리면 어김없이 삐뚤어진다. 욕실의 전등은 내가 들어갈 때만 깜빡거리고, 가스 누출기는 아내가 없을 때만 울어 댄다. 이중 현관에서 덤으로 얻은 공간은, 전기계침, 수도 미터, 가스 사용량을 일일이 대문 밖 현관의 기록판에 적어야 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시킨 일 보고받고, 칭찬도 가끔 하지만, 평가해서 야단치고, 좋은 의자에 앉아 손도 까딱 안하고 살아온 후유증이 심각하다.

 

입맛이 변한 건 참으로 다행이다. 외국나가 오래 있어도 김치생각 없다며 떠들던 자랑도 옛날얘기다. 국물이 받쳐줘야 밥 먹은 것 같고, 호박과 고사리가 이렇게 맛있는 걸 이제야 알았다. 품위고 격식이고 다 번거롭고 귀찮다. 마누라 얼굴 보며 열무김치에 고추장 섞어, 휘휘 비벼 먹는 국수가 제일이다. 집에 들어와 저녁식사를 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슬슬 걱정의 키가 자란다. 오늘은 또 뭘 해먹지?” 아내의 이 말이 예사롭지 않다. 조만간 터질 것 같은 염려가 머리 속에서 요동친다. 친구한테 들었다며 흘리던 말의 의도가 의심된다. 이 나이에 난 뭐냐?”

 

은퇴하면 써먹는다고 요리 배우러 다니는 동창신부님이 실력발표회를 연다. 원래 재주가 많지만 맛을 내는 솜씨가 신기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나와 거리가 멀다. 혼자 사는 법도 터득할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다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루카 16, 3b) 닳고닳아, 엄지와 검지가 맞닿은 손 갈퀴에 간신히 걸리는 몽당연필을 다시 잡는다. 애오라지 이것밖에 없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poveri/documents/papa-francesco_20190613_messaggio-iii-giornatamondiale-poveri-2019.html

 

가난한 이들을 향한 교황님의 마음이 눈에 띈다. 그들을 특별히 생각하여 제정하신 날이 올해로 세번째다. 미리 발표하신 담화의 전문이 공지되었지만 요약문 형태의 기사를 번역하여 2회에 나누어 올린다. 토요일에 뒤늦게 '한글판 바티칸뉴스'에 번역문이 게재되었다. 여기에 싣는 것은, 영문판 기사가 보도된 당일 필자가 미리 번역해 둔 것임을 밝힌다. 전문은 아래 URL을 클릭하여 볼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의 모습 (1)

오는 11 17일로 정해진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관한 교황의 담화가 목요일에 발표되었다올해의 주제는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시편 제9편의 말씀이다.

담화에서 교황은 이 말씀이 깊은 믿음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불의로 인해 절망하고, 삶의 고통과 암울한 미래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믿음을 심어주는 이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희망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늘 함께 살아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오늘날에도 젊은이와 어린이를 포함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속박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교황은 이 담화에서 말씀하신다“다른 곳에 가서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하는 가족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생겨납니다부모를 잃었거나, 악랄한 방법으로 착취하는 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부모와 헤어진 고아들이 있습니다. 전문성을 살려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성취하고 싶지만 근시안적인 경제정책으로 인해 고용의 기회를 잃은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들여러가지의 은밀한 이해관계로 인해 희생된 수백만의 이민자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고, 노숙자와 외면당한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도시의 거리를 떠돌고 있습니다."

교황은 강조해 말한다“다른 사람들이 쓰다 버린 것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는 가난한 이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 스스로가 인간 쓰레기통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한심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 연루되어 있는 당사자들은 눈곱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이 불쌍한 이들을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성경 속의 가난한 이들

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을 교황은 강조한다“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간절하게 호소하는 성경말씀을 우리는 결코 모른 체해서는 안됩니다."

교황은 계속해서 말한다"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고통받으시는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들과의 신체접촉을 통해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화의 모습입니다사회적 활동을 포함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일체의 노력과 활동이 바로 복음선포인 것입니다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현실인식이며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역사적 타당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1)(2)

 


(1)The Holy See, "Third World Day of the Poor, 2019: The Hope of the Poor Shall Not Perish for Ever," The Holy See, last modified November 17, 2019,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poveri/documents/papa-francesco_20190613_messaggio-iii-giornatamondiale-poveri-2019.html.

(2)Lydia O'Kane, "Pope: The Poor Save Us Because They Show Us the Face of Christ," Vatican News, last modified June 13, 2019,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19-06/pope-the-poor-save-us-because-they-show-us-the-face-of-chr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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