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르노 파파 65

복음의 기쁨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이 삭기를 기다렸다. 다시 또 돌아서는 것이 두렵다. 그렇게 3년이 더 간다는 주장에 손들어 주는 이들에게 위안을 구한다. 강태공의 낚시를 생각해 보고, 와룡선생의 마음까지 읽으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발기발기 찢어진 나약함의 천조각을 묶어 흉측스러운 허수아비를 여러 개 만들었다. 이래저래 몇 년이 됐다. 어디에도 써먹기엔 싹수가 샛노란 공부를 핑계삼아, 기웃거리는 곳이 생겼다. 딱히 마음에 모시고 싶은 의도도 아니었다. 별 목적도 없이 들인 습관에 쏠쏠한 재미가 붙었다. 콩깍지는 그렇게 씌는 것인가? 그분의 행적과 말씀에 빠져, 잊고 사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다. 몽땅 다 행복한 건 아니다. 박쥐처럼 한밤까지 끙끙대다가, 벌건 대낮엔 비실대는 좋지 않은 병을 얻었다. 그래도 머리악..

본조르노 파파 2019.05.14

태양의 찬가

묵상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쓰고 싶지 않다. 능력이나 자격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몹시 꺼려진다. 관대에 호소해 용서 청하는 것으로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냥 기억이고, 추억이며, 아쉬운 마음이고, 일상에서 만나는 하찮은 생각들이다. 미루고 미루다 여유라는 것이 싣고 온, 생각지도 못한 은총이 몽당연필을 손에 쥐어 주었다. 남아도는 시간이 무심코 흘려보낸 안타까움 속으로 수백 묶음 묻혀버렸다. 발자국을 되짚어 한참을 가보니 사순 첫주가 닿는다. 사순시기를 뜻깊게 보내려 했다고 치장하고 싶지만 자꾸 입술에 침이 발라진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로 내 마음을 끌고 간 「복음의 기쁨」에 감사하고 싶다. 그분의 소식에 맛들인 것은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간신히 눈뜬 영어 덕이다. 내 평생 가장 중요한 부분을 여름날 ..

본조르노 파파 2019.05.12

프란치스코의 경제

어제 올린 글에 인용된 ‘소논문’의 다음 문단은 이렇게 이어진다. 점점 심화되는 빈부의 격차,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계층의 증가, 조기 퇴직이나 실직으로 기가 꺾인 중년의 가장, 아예 취직조차 하지 못한 사회 초년병들, 이런 문제들은 이미 우리 교회에도 치유의 책임이 지워진 사회 현상들이다. 도덕과 윤리의식의 실종현상도 보기보다 그 깊이가 심각할 지경에 도달했다. 지하철 안에서 노인과 청년이 다투었다는 기사는 차라리 고전에 가깝게 느낄 정도로 우리는 이 문제에 많이 둔감해져 있다. 살인과 낙태, 성폭행 등은 충격의 도가 전자의 것들보다 조금 더 심하게 받아들여지는 정도일 뿐이고, 웬만한 폭력이나 집단행동 등은 오히려 게임을 즐기듯 보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외에도 교육문제, 고령화 사회에서의 노인문제,..

본조르노 파파 2019.05.12

순종과 열린 마음

도심에로의 발길이 많이 줄었다. 어쩌다 나가보면 커피장사만 잘되는 것 같다. 점심 값보다 비싼 커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나도 커피를 좋아한다. 당뇨와 비만을 조심하라는 유행에 휩쓸려 맛있는 삼박자를 끊은 건 내 커피 이력의 초창기 쪽에 속한다. 친구의 취향에 편승해 뒤늦게 배운 커피 맛이 아마추어세계에선 한 마디 거들 정도가 됐다. 봉투에 새겨진 설명이 기특하다. “진한 초콜릿 풍미와 오렌지 톤의 산미, 농후한 단맛, 입안에 머금었을 때 탄탄한 질감, 부드러운 목넘김을 추구한다.” 다른 하나는 이렇다. “복숭아, 살구 같은 새콤달콤한 과일향과 은은한 꽃향, 밀크초콜릿 같은 단맛으로 따듯한 봄에 어울리는 커피” 그 맛을 이해하고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듯한 말로 아는 체하고 싶은데 뭔..

본조르노 파파 2019.05.11

내가 선택한 그릇

어제는 오밤중이 되기 전에 귀가한 덕에 교황님 말씀을 일찍 준비해 두었다. 다행히 이른 시간에 올라온 기사가 마음에 들어 날을 넘기지 않고 끝냈다. 눈을 뜬 것은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 애매한 시간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허사다. 결국 미사 갈 시간이 다가와서야 졸음이 밀려온다. 그래, 오늘은 쉬자. 낮에 할 일이 많아 피곤할 것 같다. 엊저녁에 너무 많이 먹은 것에 핑계를 댄다. 배가 살살 아픈 것도 같다. 본당신부님의 얼굴이 뜬다. 늘 옆에 앉는 노인들의 시선이 팽이처럼 돌고 있는 망설임에 채찍을 가한다. 오늘따라 시작이 늦다. 5분이 한시간이다. 미사시간도 중요한 약속인데 이 많은 사람들의 5분을 합치면 반나절은 되겠다. 남는 것이 시간일 것 같은 노인들을 바쁜 사람들한테 갖다 붙인다. 새벽미..

본조르노 파파 2019.05.10

교회의 미래인 어린이

DDT라는 분말살충제를 몸에 뿌리던 시절을 살았다.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 사물을 정확하게 판별하는 것이다. 자연도감에서 사진으로 본 것 말고는 ‘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겨울이 시작돼서 입은 내복을 봄이 돼서야 벗었다. 말을 꺼내고 보니 다른 이들도 그랬기를 바라는 마음이 몽글몽글 아지랑이처럼 올라온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어도, 나는 몸바쳐 걔네들을 사육하는 이동식 온실이었다. 아이들을 뉘이고 머리에서 서캐를 잡는 엄마의 모습이 원숭이들이 하는 짓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은 그런대로 아련한 추억이다. 손주손녀만 생기면 삶이 확 바뀐다. 어쩌면 약속이나 한 듯 SNS앱의 프로필 대문에 애기사진이 걸리고 일정한 주기로 바뀐다. 남의 집 손녀가 자라는 모습을 직접 본 것처럼 훤하게 알고 있다..

본조르노 파파 2019.05.09

평화의 사도

반세기가 넘도록 뒤엉켜 살았는데, 막상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떠오르는 게 별로 없네. 어버이 날엔 우린 뭐했지? 교장신부님 축하식을 했던가? 저녁기도 전에 묵주신공하기엔 요즈음이 제일 좋았어. 서넛씩 짝을 지어 거니는 모습을 동성 친구들이 담 넘어 보고 부러워했었지. 다음주가 성소주일이야. 어린 마음에 들뜬 날이었지. 계성 애들, 성심 애들이 우리 엉덩이에 밥풀 붙은 거 보고 흉보는 소리 들었냐? 창피해서 혼났다. 은행나무 밑에서 찜뽕공 차며 놀던 건 내가 가끔씩 한 얘기다. 아, 슬리퍼 발차기!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 있을까? 백발백중 새총같은 기술은 우리 밖엔 모를 거다. 우리가 처음 소풍 간 곳이 어디였지? 도시락 속에 들어있던 햄만 생각나. 참 맛있었는데 입맛이 변했는지 요즘 그런 맛을 ..

본조르노 파파 2019.05.08

부르심, 놀라움, 사랑

제 아무리 말참례를 해도 내겐 뻥이다. 갓 잡아 펄펄 뛰는 놈을 소금 훌훌 뿌려 연탄불에 굽는 자리에서 먹어본 사람이라야 그 맛을 논할 자격이 있다. 예수님 앞에선 바로 꼬리를 내려야 할 것 같다. 베테랑 어부에다 구운 생선 맛을 아는 분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요한 21,9) 소주 한 병이 어울릴 자리다. 여기서 양미리 굽는 냄새가 난다. 영금정 바위 어딘가에 마음으로 새겨 놓은 아버지 자리가 있다. 가장 많이 잡는 것이 놀래기고 어쩌다 새치도 잡힌다. 탁구공만 한 복어는 저 혼자 튀어 올라 배를 빵빵하게 부풀려서 발랑 누워있다. 지가 센 놈이니 데려가지 말라는 위장이다. 대나무 가지를 정성스레 다듬어 줄기 끝에 고래심줄 묶은 것이 장..

본조르노 파파 2019.05.06

동서양을 잇는 다리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키가 큰 옥수수 밭에 서있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내 머리카락보다 촘촘히 심어진 소들의 겨울 여물과, 밤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은 별들과,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 영혼뿐이다. 갑자기 그 하늘 판에 별똥별 하나가 획을 긋는다. 그리고 잠시 후 개미떼 같이 총총하던 별무리가 일제히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다. 황급히 몸을 피한 곳이 눈설지 않다. 언젠가 한 여름을 보낸 곳이다. 한기가 느껴지는 바닥에 엎드렸다. 구름이 가는 것인지 달이 오는 것인지 분간이 안된다. 고향집 앞바다와 설악의 준령이 자리를 바꾼다. 이 바꿈질을 몇 번 반복하더니 파노라마가 되어 내 머리 주위를 휘감는다. 그 앞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건 예수님의 십자가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있다. 수많은 군중도 성경에서..

본조르노 파파 2019.05.06

만남, 평화, 사명

서울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밖에 없다. 시간 전에 학교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새벽 4시 20분 차를 타야 했다. 20분만 걸으면 어디서도 터미널에 도착할 만큼 작은 도시가, 통행금지시간을 배려해서 정한 운행시간표다. 미시령과 한계령은 군사전용 도로였다. 내 생각엔 진부령의 경사가 그나마 완만하여 차들이 그리 다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반 차량이 이용할 수 있게 그 두 길의 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꽤 나중 일이다. 엄마 품을 떠나 생긴 뻐근한 가슴통증은 동이 틀 무렵, 영 넘어 원통에 와서야 조금 풀린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다시는 가기 싫은 지저분한 변소를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진부령 단일로에서 교대로 오가도록 차를 막던 군인들의 무전기 소리가,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

본조르노 파파 201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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