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르노 파파 65

사람이 중심

회라고 해야 오징어를 듬성듬성 썰어 채소와 버무려 대충 무친 것이다. 거기에 빙초산을 듬뿍 뿌려야 오징어회가 완성된다. 어떻게 위가 안 뚫리고 살았나 모른다. 아버지는 한 젓가락에 주먹 덩이만큼 집어서 한 입에 다 드셨다. 그것 말고는 멸치, 가자미, 문어 정도나 날로 먹지 참치, 광어, 도미, 우럭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동해안 생선은 뭐니뭐니 해도 명태다. 명태는 정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알도 창자도 심지어 저버리까지 알뜰이 먹는다. 나는 지금도 제일 먹고 싶은 것을 꼽으라면 김치 속에 박아 삭힌 명태다. 인고의 5월이었다. 양양에 새로 부임한 신부님을 만났다. 본국 휴가를 다녀와서 이삿짐을 찾으러 오신 김이다. 사제관에 거처가 마땅치 않아 출퇴근하기로 약속한 것이 4월 중순인데, 그게 뭐 근..

본조르노 파파 2019.05.04

배타적 민족주의

인도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를 직원으로 채용한 적이 있다. IT벤쳐붐이 일던 시절 나도 그 파도 속에 있었다. 소프트웨어산업이라는 것이 ‘코딩’기술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들여다보면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른 점이 많다. 지식산업으로 보이지만 생각보다는 단순한 기술기반의 노동집약산업이다. 성공하면 엄청나게 부가가치가 높지만 하루하루 쌓이는 것 없이 세월이 지나면 월급 식충이들만 남는다. 인본주의 정신과도 거리가 멀다. 실리콘밸리와의 16시간 시차는 여기서 낮에 작업한 것을, 거기서 새벽에 받을 수 있게 보내는 사업상 기묘한 이점을 제공했다. 그래도 프로그래머들은 밤과 낮이 바뀐 올빼미가 대부분이다. 수닐은 한국에서 직장을 가지기 위해 많은 것을 교육받고 온 사회 초년병이었다. 40대 젊은 사장인 내 앞..

본조르노 파파 2019.05.03

아버지의 사랑만이

예나 지금이나 교통사고 보험환자 병동엔 장기입원 환자들이 많다. 오늘 가보니 그렇게 아쉬웠던 간병 보호자 편의장비가 놀라울 정도로 개선됐다. 환자침대 밑에 달린 설합 형태의 간이 평상에서 밤을 지샜던 생각이 낙숫물처럼 쏟아진다. 이 생활이 벌써 3개월째 접어들었다. 내 옷을 싸 들고 온 아내를 두고 나는 여의도로 출근했다. 큰놈은 2년 4개월, 딸은 고작 생후 4개월 반이 되던 날 병원에서 성모성월을 맞았다. 고생에는 이골이 났지만 기약이 없다는 고통을 이겨 내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아내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동2로에 있는 작은 병원이었다. 판독용 형광판에 걸려있는 것은 어머니의 대퇴골 엑스레이 필름이다. 방금 7시간 동안 뇌수술을 받고 나오신, 만72세 노인의 것이다. 대퇴골절만으로도 치..

본조르노 파파 2019.05.02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분

15년만에 다시 온 파티마는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과 사뭇 달랐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날인 매월 13일엔 광장에서 장엄미사가 봉헌된다. 파티마의 9월 저녁이 뜻밖에 쌀쌀했지만 순례객들의 열기만은 하나도 식지 않고 여전하다. 꾸르실료 세계 지역대표회의는 기본사상 개정안 의결이라는 중요한 의안을 놓고 대단히 빠듯한 이틀 간의 회의일정을 소화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발칸반도를 거쳐 여기까지 오느라 벌써 열흘 이상 자리를 비워 둔 터였다. 오늘밤 출발해야 내일 아침 리스본에서 일찍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 미리 이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것을 장엄미사 내내 후회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4시, 프란치스코 마누엘 살바돌(Francisco Manuel Salvador) 세계본부 회장이 잠을 설친 ..

본조르노 파파 2019.05.01

이발사의 후예

삼남매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던 생각이 난다. 심장마비란 단어가 어린 가슴에 박아 놓은 대못이 아직 남아있다. 배달의 대명사 오토바이의 전신인 큰 자전거가 우리집 마당에 가끔 정차하는 것은 세상 착한 우리 아버지 대자 때문이었다. 영세자가 넘쳐났다. 구호물자의 상징 밀가루에 이끌려 온 사람들, 연애질이나 할까 싶어 기웃거리는 더벅머리 총각들... 성소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때였다. 남자의 반은 우리 아버지 대자고, 여자의 칠할은 우리집의 딸이 되었다. 둘째 누나에게 눈독들이다 아버지께 된통 혼나고 집에 돌아가 칼로 손등을 찍은 정열의 사나이는 내 가정교사였다. 배달 자전거 형은 무언가 달랐다. 배운 것이 없지만 초등학생인 내가 봐도 참 진실한 사람이다. 그 형이 싣고 다니던 것이 간장이었나? 그 기..

본조르노 파파 2019.04.30

함께 사는 지구

다행히도 주교님은 본국으로 휴가를 떠나고 계시지 않았다. 부주교님께 말씀드리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내가 부주교님을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겨울방학을 이용해 아버지를 따라 외갓집에 갔을 때였다. 풍수원성당에서 만난 사십대의 젊은 사제, 그분이다. 도움이 안되는 기억이다. 엄하기로는 두번째가 섭섭한 분이라니. 갑자기 걱정이 커진다. 이 분이 주교님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 네 생각대로 해보거라. 2년 동안의 새로운 경험이 네 장래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의외였다. 시종직을 받은 사람에겐 상상하기 힘든 배려였다.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복학연기 승인을 받고 난 이후 나는 끝내 거기로 돌아가지 않았다. 동창들이 다 입대하고 복학한 형들과 살던 첫해 겨울, 부주교님 본..

본조르노 파파 2019.04.28

그들이 찾는 것은?

어쩌다 한번씩은 ‘안개고동’이 내 귓전을 찾아온다. 엄마가 빚은 만두를 입에 넣었을 때 처음 혀끝에 닿던 맛의 기억처럼, 어린 가슴을 몸서리치게 하던 갑갑증이 내 머리 속 어딘가 살아 남아 있다. 철부지 어린아이가 밤새 뒤척이다 새벽을 맞게 한 것은 등대가 내지르는 애달픈 절규였고, 등대가 그토록 섧게 운 것은 천지를 뒤덮은 바다안개 때문이었다. 소년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그날의 상념들은 그의 인생을 줄기차게 따라가며 한번에 하나씩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크레바스를 사이에 두고 양편에 서있는 사람들처럼 ‘지척에 있는 멀고 먼 마음’을 수도 없이 본다. 한 서까래 밑에 사는 수천의 동거인들은 층간 구조물로 인해 끊긴 인연들이다. 인터넷이라는 또 하나의 우주는 이 세상 인구를 몽땅 끌어들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본조르노 파파 2019.04.27

선포되어야 할 복음

늘 산책하는 코스를 바꾸면 새로운 맛을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다시 그 길로 돌아온다. 딱히 짚어 내기는 어렵지만 추억하고 싶은 것에 끌린 것이다. 많이 정들었던 녀석이 떠난 지 벌써 5년이다. 내 산책 길에 늘 함께했던 그 놈과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나누고 살았다.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루크의 기일에 연도를 바치면 안될까? 운동으로 하는 산책이 덤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가끔 딴짓 하다가 어디까지 했는지 헷갈릴 때가 있는 것이 묵주기도다. 한 알이라도 빼먹으면 찜찜하다. 결국 넉넉히 뒤로 돌아가서 계속한다. 50번을 채워야 기도가 된다는 것은 교회법이 정했을까, 예식서에 나오는 규정일까? 많이 건성으로,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지만 문만 나서면 묵주를 쥐..

본조르노 파파 2019.04.27

하느님의 음성

부모님을 뵙는 것은 교구장님께 인사 드리고 난 다음 며칠 뿐이다. 여름방학엔 교구 신학생이 단체로 MT를 한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식구들의 우애를 깊게 하려는 조치다. 나는 방학 때마다 시골 공소로 파견명령을 받았다. 거기서 거기지만 깡시골에서 살아보지 않은 나는 한달 남짓 오지생활에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산골 아이들의 여름 간식은 옥수수가 전부다. 그 아이들에게 감자는 간식이 아니고 생명부지를 위한 귀한 먹거리다. 나는 '잿변소'를 경험한 흔치 않은 사람이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대단히 위생적이다. 그곳은 아이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특히 옥수수 알갱이는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재와 함께 밭으로 간다. 바닷가 꼬마들의 주전부리는 내게 퍽 익숙하다. '도루묵 알'..

본조르노 파파 2019.04.26

소중한 선물

산벚꽃이 '봄천지'를 수놓았다. '다소곳'의 전형 같은 이 꽃을 언제부터 내가 보았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남한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는 길이 기억에 밟힌다. 윤중로의 벚꽃이 밉다는 생각은 안 했다. 눈곱만큼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드니 지가 엄청나게 예쁜 줄 알고 교만해졌나 싶은 나만의 의심이다. 하느님이 주신 새 옷을 입고 산들의 허리춤이 푸르러 갈 무렵에야 산벚꽃은 모습을 드러낸다. 걔네 가슴에 예쁜 '부로치'를 붙인다. 이름표 옆에 '콧물수건'도 끼워준다. 단추를 달아주고 머리핀을 꽂는다. 희뿌연 도시의 가스실을 벗어나야 만날 수 있으니 일년에 몇번 볼 기회도 없다. 걔네 팔에 힘이 붙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야리야리한 꽃잎을 다 따먹고 시침 뚝 뗄 것이다. 며칠 남지 ..

본조르노 파파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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