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르노 파파 65

꿈 속에 뿌리를 내리고

“꿈 속에 뿌리를 내리고 앞날을 보라”는 교황님의 말씀이 마음에 닿는다. 오늘 새벽 교황권고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내 머리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 가는 단어가 점점 많아진다. 특히 ‘사랑’과 ‘만남’이 그렇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코린 전 13,11)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슬슬 이해가 된다. 네 명의 누나들과 복닥대고 산 어린시절, 흡사 고아원 아이들처럼 포개 지낸 신학교, 그 이후 새롭게 꾸며진 가족과 함께 오늘까지 이어온 삶 안에서 이 단어들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었다. 유난히 ‘만남’이 그렇다. 매일에서 몇 주로, 몇 달, 몇 년까지 그 간격이 자꾸 벌어진다. 뜸함의 길이가 마음..

본조르노 파파 2019.04.04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몹시 혼란했던 시기에 "하느님은 정말 정의로우신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걸 용기라고 해야 하나? 학교 신문에 정의를 촉구하는 글을 싣고 모두와 함께 행동으로 그 주장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신상의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용기는 젊음에서 얻은 것이었으리라. 위장술은 나이와 함께 자라는 속성이 있나 보다. 거짓말과 비방의 기술도 그런 것 같다. 나이 먹으면서 늘어난 것은 ‘말’뿐이고 말 속에 담긴 것은 못된 ‘기술’이다. 예고된 대로 교황권고 "Christus vivit”이 공표됐습니다. 전문이 함께 공개됐지만 내용이 너무 많아 요약보도기사를 싣습니다. 그것도 길어 [제5장]부터 [제9장]은 내일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젊은이들이여!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을 ..

본조르노 파파 2019.04.03

담쌓는 사람

낭만의 둘레길로 단장된 낙산의 성벽을 가본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나는 어려서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그곳은 내 인생 제2막의 무대였다. 눈만 뜨면 보고 살던 그 성벽이 그렇게 크고 긴 줄 몰랐다. 옛날엔 그저 우리가 사는 공간과 그 옆에 딱지조개처럼 붙어있던 집들을 가르는 담장일 뿐이었다. 그 담이 나를 바깥 세상과 떼어놓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고, 그토록 엄한 규칙생활도 저 너머 동네에 대한 동경의 싹조차 내 마음 안에 틔우지 못했다. 비무장 지대를 가르는 우리의 철책선이 통일의 심볼로 승화된 베를린 장벽처럼 터지는 날을 살 수 있을까? 아메리카 대륙 허리에는 어쩌자고 그렇게나 큰 담이 새로 올라가고 있는가? 교황님의 마음 속엔 예루살렘의 분쟁과 함께 그런 것들이 걱정으로 쌓여있는 것..

본조르노 파파 2019.04.02

오 아름다운 샛별이여!

날이 밝는 시간이 부쩍 일러졌다. 오늘따라 눈에 드는 새벽 모습이 퍽 새롭다. 많이 기운 하현달에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달려있는 샛별이 유난히 밝다. ‘샘 바람’ 덕에 도시의 토물들이 다 걷힌 맑은 하늘 때문일까? 새벽하늘을 비추는 아름다운 샛별, 그것은 성모님의 수 많은 이름 중 하나이다. "빛나는 샛별이시여, 약한자의 힘이시여, 죄인들 피난처시여, 괴로움의 위로시며 우리들의 도움이여, 영광의 성모 마리아, 우리 위해 빌으소서!" 교황님은 모로코 사목방문 첫날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과 예루살렘이 인류의 공동유산이라는 합의문에 서명하셨습니다. 세 종교의 성지이면서 심각한 분쟁지역인 예루살렘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Vatican News에 보도된 내용에서 답을 얻습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이..

본조르노 파파 2019.04.01

부활을 기다림

초등학생 딱지를 떼자마자 떠난 고향집에 학부를 마치고 돌아왔다. 눈이 녹으면 입영열차를 탈 것이라 믿었건만 처절한 외로움 속에 4월을 맞고 있었다. 소년기를 갓 접어들었을 때까지, 아늑한 보금자리였던 '우리 집'은 오래전 출가한 나를 쉽게 받아주지 못했다. 어제 산책 길에 그때를 추억하게 하는 바람을 만났다. 유난히 봄 바람이 심한 동쪽 끝 내 고향엔 행복한 기억 말고도 남아있는 것이 있다. 4월의 첫 아침,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제법 많이 흩뿌려진 꽃잎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겨울의 마지막 자락을 보게한다. 유치한 습작 시에 제목으로 붙인 적 있는 '꽃샘'이란 말이 어려서는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봄의 설레임을 싣고오는 진달래, 개나리를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때 이후로 이맘때가 되면 더 ..

본조르노 파파 2019.03.31

교황청의 새 법령

교황님은 '약자'들의 보호를 위한 새로운 법령을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 재위 6년, 그분의 아픔 중 하나는 성직자들의 성추행 문제였습니다. (3월 12일자 Vatican News 사설) 많은 고뇌와 논의 끝에 제정된 법과 지침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은 새로운 법의 공포에 즈음하여 교서를 내시고 입법 취지를 밝히셨습니다. 그 취지는 성추행이란 지엽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가장 작고, 가장 힘없는 이웃에 대한 교회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바티칸이나 바티칸의 대목구, 그리고 바티칸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한정된 법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이 땅, 이 사회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인 것이 분명합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향해..." 바티칸은 금요일, 미성년자와 ‘취약한 이들’의 보..

본조르노 파파 2019.03.30

완고한 마음

신학교의 학기는 침묵피정으로 시작한다. 매일의 시작도 침묵 중에 하는 묵상이다. 새벽에 기상하자 마자 올라가야 했던 춥고 불편한 성당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단히 엄했던 교장신부님께서 지도하시던 묵상은 온통 졸리고 지루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침묵이 듣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 힘든 시간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Loquere Domine"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교장신부님의 묵상은 늘 사무엘 상권 3장 10절 성구 앞부분의 말씀으로 시작됐다. 오늘 교황님의 강론이 어릴 적 힘들었던 새벽묵상의 성당으로 내 마음을 데려다 주시고 당신의 강론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돌아오너라” Vatican News 는 오늘, 바티칸의 카사 산타 마르타 ..

본조르노 파파 2019.03.29

“일용할 양식”

내가 태어난 곳의 성당은 전쟁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1953년, 성모승천대축일에 완공되었다. 성당 신축 당시 신자는 6가구뿐이었다고 사료는 증언하고 있고, 당시 본당의 사목적 과제는 “한국전쟁 후에 양산된 고아와 가난한 이들, 그리고 실향민들에 대한 배려”였다고 덧붙인다. 나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성인을 보았다. 그들은 진정한 순교자였다. 탯줄을 떼고 이틀만에 그분께 세례를 받았고 그곳을 떠나시기 전까지 12년간을 매일 뵙고 살았다. 원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분은 아일랜드에서 사제서품 직후, 삼십대 초반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 몸을 던졌고 양양, 속초, 인제 등 세 곳(필자의 기억에 따름)에 성당을 지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신부님의 셔츠를 집에 가져와 깁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그 낡은 셔츠의 기억이 생생하다..

본조르노 파파 2019.03.28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제2차바티칸 공의회」 이전, 미사에서 복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부활성야 미사에서 ‘향잡이’를 하는 것은 복사단의 대장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마도 요즈음 '아이돌'이 느낄 것 같은 왕자의식, 성취감 그런 종류의 기분이 아니었을까? 종치는 기술도 복사의 연륜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기본 기술에 속하고 울림의 길이를 조절하는 수준까지 가야 ‘향잡이’를 노릴 수 있었다. 작디작은 도시 – 라고 하기조차 어색한 – 에서 성당은 대단한 건축물이었다. 그 뾰죽지붕에 달린 큰 종을 치는 일은 초등학생 어린아이에겐 엄청나게 버거운 일이었다. 관리인 아저씨의 피치못할 출타가 만들어준 기회, 골리앗을 대적하는 다윗이 돌팔..

본조르노 파파 2019.03.27

"Christus vivit”

"Christus vivit” 이 라틴어 절은 교황님이 서명하신 새로운 교황권고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vivit은 vivere(부정사)의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입니다. 직설법은 가정법과 대비되는 문법용어로 실제로 일어나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우리말 제목이 나오겠지만 ‘살아 계신 그리스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그런 의미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냥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2014년 9월, 필리핀 다바오에서 열린 ‘다바오대교구 꾸르실료 도입 50주년 기념 울뜨레야’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은 Teodoro J. Buhain 주교님의 영성강의가 기억납니다. 스페인어에도 능통한 주교님은 꾸르실료운동을 말하는 ..

본조르노 파파 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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