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31

신학의 오순절

잠을 잘 수가 없다. 하루 종일 땡볕에 달아오른 건물이 밤에는 찜통이 된다. 6월초부터 30도를 훌쩍 넘는 로마 속 건물이 그 흔한 냉방시설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다. 밤이고 낮이고 피하고 숨을 곳이 없다. 내가 한여름을 보낸 공소 앞 시냇물처럼 사방에서 모인 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래도 여기에 온 특별한 의미가 이 더위를 견뎌내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초등학생 두 아이를 데리고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만해도 나는 사십대 초반의 젊은 아버지였다. 로마를 떠나기 전날 식구들을 끌고 여행그룹을 이탈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머리 깊이 박혔던 기억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욕심이 부린 억지다. 나보나광장의 노천카페에서 그곳 사람들처럼 저녁식사를 하고, 트레비분수와 판테온을 돌며 가진 즐거운 시간..

포용의 신학

열댓 명의 일주일 분량 김치가, 비닐로 된 비료포대로 하나 가득이다. 이것을 막대자루에 꿰어 둘이 걸머메야 이동이 가능한 양이다. 교구신학생 전원이 우리집 마당에 모여 여름 캠프를 출발한다. 각자 등에 진 배낭의 높이가 하나같이 한자 이상 머리위로 솟아 있다. 설악동을 출발해 천불동 계곡을 타고 대청봉을 넘어 오색에서 머물다, 양양과 주문진 사이에 있는 인구 공소까지 가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계획된 시간에 따른 순조로운 진행은 애저녁에 어그러진다. 출발 당일 첫 기착지를 오색으로 잡은 것 자체가 무리인 데다가, 설악동에 도착해서 비를 만났다. 이 빗속에 산을 오를 수 없어 비선대 산장을 빌려 첫 밤을 보내기로 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가파른 비탈을 내려간다. 의도된 극한체험도 아니지만 모험으로 치부하기..

사랑의 불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에 들어섰다. 말이 손님이지 며칠 전 받은 인사청탁의 장본인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앉을 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다. 주객이 바뀐 것을 모르는 눈치다. 가리고 지켜야 할 기본예의는 모른다고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에도 좌석선택의 매너가 있다. 그것도 차종에 따라 다르다. 식탁예의는 말할 것도 없다. “Don’t make any noise.” 내가 배운 중학교 영어교과서는 단지 말만 가르치지 않았다. 계열회사 몇 개를 묶어 전산화를 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막 286PC가 탄생한 시대이니, 중대형시스템 도입이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그 덕에 다국적 초거대 기업의 방문기회가 생겼다. 첫인상에 적잖게 놀랐다. 장발이 유행하던 시절임에도 그들의 머리는 사진..

교회 안의 여성

제네바를 떠난다. 어떤 도시는 그곳에 와있다는 것 자체로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국민학교 사회과목에서 주워들은 알량한 상식 때문이다. 레만호를 바라보며 우리학교 뒷마당과 닿아 있던 영랑호를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종교개혁파들의 중심지, ‘개신교의 로마’가 된 점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경치가 주는 감탄의 강도는 자꾸만 높아간다. 놀라움에 크게 확장된 동공 앞에 눈송이의 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몽블랑 정상을 바라보며 마시는 찻잔 위에 남쪽으로 내려갈 미끄러운 길의 영상이 떠오른다. 걱정의 대가가 엄청나다. 열린 것 모두가 확 터진다. 내 가슴은 조금 전 지나온 정상까지 두둥실 떠올랐다가, 하늘을 수놓던 불꽃놀이 섬광처럼 산 전체에 가득 퍼지고 나서, 옥빛 지중해 위로 떨어진다. 이번 겨울방학은 동..

공의회와 여성

아버지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고아원 원장님을 나는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내 친구의 외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틈이 없는 친척이었다. 친구의 형은 내게도 형이고, 걔네 삼촌과 고모를 나는 '아재'라고 불렀다. 성당 말고 어쩌다 놀러 간 곳이 할아버지네 고아원이다. 미군부대에서 보내준 시리얼이 그곳 아이들의 간식이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었지만 달지 않아서 별로 맛은 없었다. 굳이 다른 이유를 대라면 고아원 아이들의 귓속에 덕지덕지 붙은 귀지를 연상하는 결벽증 때문이라 해야 하나? 우리는 모양이 비슷해 그것에 ‘귀청과자’라는 사투리 이름을 붙였다. 고아들이 늘면서 돌봐 줄 손길이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이 낳은 가슴 아픈 비극이다. 성탄이 다가오면 성당 마당에 구호품 옷가..

아마존 시노드

‘수용’이란 어휘가 주는 감정이 간단하지 않다. 걱정으로 뒤덮인 슬픔, 힘에 눌려 당하는 억압, 중요한 것을 강제로 빼앗기는 억울함, 그런 것들이 섞였다. 우리 작은 밭은 성당 마당에 계신 성모님이 보시기 좋은 방향과 거리에 있고, 성당 너머 다음 언덕엔 큰 밭이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에 감자를 심었다. 뜨거운 흙먼지가 싫었지만 누나들과 밭에 가는 즐거움은, 단조로운 풀밭 사이에 숨겨진 청량한 시냇물 같았다. 동홍천에서 끊긴 고속도로가 이어졌다. 세상 좋아졌다는 표현을 또 쓰자니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트림이 올라온다. 사실, 이 길을 타고 집에 간 적은 한번도 없다. 단지, 방학 중 사목파견 때문에 서석을 지나 내면까지 가서 한 겨울을 보낸 것과, 내린천 줄기를 따라 구룡령을 넘어 동해안에 갔던 것이 내..

나를 기억하시는 하느님

며칠 장맛비가 쏟아붓더니 잠수교가 물에 잠겼다. 아침에 간신히 건너왔는데 퇴근 길이 걱정된다. 방법이라곤 제3한강교를 넘어가는 것뿐인데, 그러려면 1호터널을 빠져나가는 것이 큰 걸림돌이다. 좌석버스라는 이름의 승합차가 있었다. 입석을 하면 천장이 머리를 눌러 꺾어버리는 작은 사이즈의 버스다. 입석 마저도 얼마를 기다려야 탈 수 있을지 앞이 캄캄하다. 장마철이면 겪는 불편이지만 인구유입이 늘면서 해마다 고통의 수준이 급상승한다. 사우나독을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온 몸이 흠뻑 젖은 것 말고도 목이 아파 똑바로 펼 수가 없다. 지나치게 풍성한 콩나물 시루 안에서 두시간을 바닥만 보고 서있던 탓이다. 강을 건너오자 마자, 체면이고 염치고 모두 팽개치고, 그 지옥을 탈출하는데 기를 썼다. 긴 여름 태양도 버티지 ..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토록 엄하고 폐쇄적인 신학교 안에서도 선배들이 들으면 놀라 넘어질 꿈 같은 일이 일어났다. 휴게실에 설치된 텔레비전이 촌놈들에겐 신기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만화가게에서 김일의 박치기를 보며 자란 문화인에 속한다. 우리에게 TV시청이 허락된 것은 일주일에 한번, 특정 프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게리슨 유격대」, 「타잔」 같은 옴니버스드라마가 정기시청 프로였지만, 국가대항 축구 결승전 같은 빅매치가 아주 드물게 교장신부님의 특별 관면에 따라 시청이 허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축구가 새 역사를 썼다. 아쉬움이 남지만 어린 선수들이 기특하다. 교장신부님이 운동하시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하긴 밤낮으로 그 넓은 신학교 곳곳을 다니시니 그만한 운동이 있을까? 그런 분 밑에서 자..

가난한 이들의 날

사제관과 식복사 아주머니가 사는 집 가운데 제법 넓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중앙을 지나서도 꽤나 긴 거리를 띄어 놓고, 정면에 가로 앉은 건물 안에는, 신부님의 차고와 창고가 한 지붕을 덮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못살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첫째 이유는, 그 마당에 매여 있던 늑대같은 녀석이 제공했다. 제 놈이 가장 많이 만난 열 사람 안에 내가 들 텐데, 도무지 친해질 기색이 없다. 할 수 없이 아주머니 집 뒤로 난 작은 길로 돌아가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은 신부님이 자동차를 수리하는 날이다. 어깨에 거는 멜빵이 달려있고, 가랑이가 갈라진 정비복을 입으셨다. 늘 입는 수단과는 위아래가 한통으로 된 옷이란 공통점이 있다. 정비를 위해 바닥에 파인 구덩이 아래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신다. 거기서 신부..

천주경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 아침이면, 내 가슴 속에 일렁이는 아주 특별한 물결이 있다. 어려서는 비가 오는 날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나의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는 9일 동안 미사 끝에 이 노래를 부르며 방학을 준비했다. 시험을 치르는 괴로움은, 집에 간다는 희망으로 가득 메워진 이 가락 속에 잠시 몸을 숨긴다. 이 노래의 악보는 늘 엄마의 얼굴로 채워져 있어, 가사에 담긴 뜻을 볼 틈이 없었다. 아홉 번만 꼽으면 될 손가락을 백 번도 더 헤아린다. 과자 부스러기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우리에게, 끼니는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오, 예수”를 부르던 날 점심만 그 중요한 식사의 의미가 사라진다. 내게만 남은 기억일까? 짐을 꾸려 나서는 마당 곳곳엔 어김없이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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