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31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함께 열정을 쏟아 참여했던 운동을 되돌아봅니다. 좋은 날이 많았지만 희뿌연 연기 속에서 더듬고 헤매던 기억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서 웃은 시간이 대부분인 것 같아도, 얼굴 벌개져 날카로운 화살촉에 쓴 말을 담아 쏜 순간이, 꽃꽂이 속 강아지풀처럼 눈에 띕니다. 기쁨, 행복, 우정, 사랑, 이런 것들은 빨랑까 봉지에 담고, 눈물, 걱정, 미움, 분노, 그런 것들은 후회의 통에 넣었습니다. 그 마음과 노력이 모여 있는 방에 ‘봉사’라는 문패가 달렸습니다. 가운데 놓인 묶음은 하늘색 봉투에 들어 있고, 구석쟁이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보자기의 거무튀튀 색깔은 이름짓기가 어렵습니다. 예쁜 방을 만들어 분홍 바구니만 넣을 걸 그랬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야 어울릴 겁니다. 우리가 ..

아들의 기도

신부님은 면도기를 들이대는 내게 턱을 내맡기셨다. 두번째 입원이다. 한번 꺾인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 취임하시던 날 성체조배를 마치고, 환영인사를 위해 성당에 와있던 신자들에게 던지신 제일성이, 120년을 사시겠다는 호언장담이었다. 열심히 생식을 하고 부지런히 걸으신 분이 병원에 누워 계신다. 비서신부님과 점심을 같이했다. 내일 있을 사제인사의 내용을 알아보겠다는 심사다. 못할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새로 오실 신부님께 인사드릴 사람이 없어 대비가 필요했다. 본당이 일주일 넘게 비기 때문이다. 소설 하나를 쓸 만큼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성전건축을 마무리하신 신부님의 새임지가 내일 정해진다. 그 내일은 내가 기획한 성지순례의 첫 날이다. 이 순례는 떠나실 신부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장단이 ..

나를 찾고 계신다

그저 시오리 정도되는 길이 참 멀기도 했다. 작은 냇물을 건너던 생각이 나지만, 길에 배겨 있는 돌의 크기가 매우 다양했다는 기억이 더 또렷하다. 한번 가보고 싶다며 되뇌이는 말은, 거기를 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야 했던 바닷가 마을을 돌아서는 순간, 안개 같이 흩어져버린다. 해발 삼백 미터가 채 안되는 운봉산 서쪽자락의 작은 마을은 구교우들이 모여 사는 옹기골이었다. 안방과 부엌을 가르는 토벽의 정 중앙에 편지지 한 장 크기의 구멍이 파여 있다. 그 턱에 올려진 작은 호롱이 비리비리 맥없는 불꽃 하나를 밀어 올려, 이쪽 저쪽의 어둠을 간신히 내몬다. 옹기가마의 열기가 식은 지 오래된 이곳 사람들의 삶은, 척박한 밭농사가 대부분이다. 복령 캐러 갔다가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

내가 곧 간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 안의 공기가 거짓말처럼 마음을 숙연하게 가라 앉힌다. 오후 다섯 시가 살짝 못됐는데, 성체조배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성체불이 되레 어두움의 농도를 짙게 하여, 감실을 바라보는 눈꺼풀을 닫아준다. 숙연이 경건으로 바뀌는 미세한 변화를 느끼며 신비의 영역에 진입한다. 검은 망막에 독경대와 해설대가 찍힌다. 거기에 한 젊은이가 서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봉사인가, 연기인가? 기도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제대 위아래를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관리인을 향해, 합주단 지휘하듯 손놀림을 연발하는 중년 남자는, 이 본당 사목회 총무이지 싶다. 나이 지긋한 총감독이 성당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다가 점잖게 총무를 부른다. 내기를 해도 이긴다. 그는 총회장이다. 성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

긍정적 징후

탐험대를 조직했다. 벌써 몇차례 ‘작전회의’가 있었다. 제법 많은 준비물을 조달하는 것이 우리 형편 상 녹록하지 않다. 후방 마무리 책임자는 만장일치로 진즉 선발되었지만, 척후 임무를 맡은 선봉대장을 뽑는 데에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탐험 마지막의 시간 관리가 중요하여 체력과 순간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소하고 부실한 체력 탓에 대열의 제일 중간 자리를 배정받았다. 몇개 받아 둔 날 중에서 D-day를 정했지만 H-hour를 잡는 것에는 신중을 기했다. 탐험에 소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추정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행의 날이 왔고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작전을 개시했다. 공식적인 시작기도 없이 침묵 중에 각자 하자는 약속도 미리 해 두었다. 작전에 방해되는 기도 소음조차도 사전에 차단하겠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아내가 챙겨준 옷을 싸 들고 일찍 집을 나선다.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아껴 운동까지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짜서 만든 습관이다. 오늘은 혼자 대충 챙겨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사람은 남편을 버릴 기세다. 긴 세월 엄청나게 큰 부담을 준 어머니의 사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완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애를 출산하고 한달 반 만에 시작된, 혹독한 간병이 3년 이상을 끌었다. 이제 두 아이도 어느정도 키웠는데 또 다른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내가 왜 모를까? 그것만 아니라면 수천 번이라도 양보하고 싶다. 두번째 비닐하우스 성전을 지었다. 처음 지은 자리에 성전건축을 시작하려고 새 터로 이사한 것이다. 시멘트를 채운 사각 깡통을 다리 삼아 널빤지를 얹은 의자나, 바람 숭숭, 덥고 춥고, 조..

하느님, 저의 희망

안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맛있는 물을 먹고 자랐는지 안 것은 집을 떠난 다음이다. 우리집 닭은 참 고은 노래를 불렀다. 여명 알리미, 닭우는 소리에 대한 환상은 얼마전 동남아 여행 중에 깨졌다. 아침마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달걀을 상납받았으니 우리 닭만 예뻣는지도 모른다. 사랑도 고마움도 다 제 잇속 차림이다. 어머니는 구정물 처리를 위해 돼지도 한 마리 키웠다. 냄새는 좀 났지만 덩치가 산 만한 녀석은 성당너머 우리 밭에 뿌릴 거름을 부족하지 않게 생산했다. 단차가 있는 뒤뜰의 윗단에는 작은 소대 규모의 장독대가 한결같이 점호를 준비한다. 단층 둘레의 장식은 채송화와 봉숭아의 몫이다. 나팔꽃과 맨드라미, 호박꽃이 주인이었지만 양귀비꽃도 손님으로 함께 살았다. 성당에서 흘러내린 비탈의 경계에..

기도의 밑그림

마침내 파란만장했던 공사가 마무리되어 새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을 맛봤다. 계속해서 행사가 이어진다. 입당음악회를 끝내고 겨우 한숨 돌린 것 같은데 벌써 5월에 들어서 있었다. 이른바 ‘IMF 금융위기’로 인해 시공사와 타절한 후유증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제법 많이 남겼다.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성전봉헌식 준비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웠지만 축성이 끝나면 떠나실 신부님을 위해서라도 잡힌 행사를 소화해야 한다. 어버이 날을 맞아 원로사제를 찾아 뵙기로 한 계획이 그 중에 끼어 있다. 와락 기대가 덮친 것은 말이 나온 첫날이고 시간이 갈수록 자꾸 망설여진다. 25년이 족히 지났다. 그 어른은 어떤 모습이 되어 계실까? 대신학교 본고사를 보기 위해 모처럼의 긴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홀가분한 기분..

하느님의 사랑

예전부터 매미우는 소리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저도 슬퍼서 우는 것이라 생각하니 연민마저 일었는데, 알고 보니 구애의 방편이라 한다. 싫은 표현을 대놓고 할 걸 그랬다. 사랑을 구하는 노래라는 것이 땡볕에 물을 들어붓는다. 사우나독 안에서 바짝 달궈진 돌에 종지 물 떠 붓는 것과 흡사하다. 옥수수 밭이 주는 답답함을 모르면서 시골의 여름을 논하기는 어렵다. 조밀함에 습기가 더해지면 숨막히는 화생방훈련의 '가상현실체험'이 된다. 감자 밭 고랑에 뒹구는 돌멩이가 태양의 열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자칫 터질 것 같아 옆에 가기가 겁난다. 자갈투성이의 좁은 신작로는 하루 한 번 지나가는 달구지 같은 버스에게 깡마른 몸을 억지로 내준다. 염치없는 막걸리 차가 불쌍한 이놈의 등때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밟아 재낀다..

사랑의 약점

‘펀치볼’, 매우 낯선 지명이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고, 삼엄한 경계 속에 갇힌 곳, 분단의 냄새가 짙게 나는 남쪽 땅 최북단에 있는 군사시설이었다. 미군 종군기자가 자기 나라의 화채그릇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여준 ‘해안분지’라는 것을 몰랐다. 그 펀치볼에서 남쪽으로 사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짐을 풀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인제군 서화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펀치볼까지 가기가, 그것이 속한 양구군의 주읍 보다 훨씬 가까웠다. 사상 최고의 혹서라고 떠는 호들갑은, 숫자를 보고 부리는 엄살이지 싶다. 제법 북쪽이지만 그곳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다. 공소 대문을 나서던 발걸음이 유격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포병 대열의 허리춤 앞에서 막혔다. 그 많은 장병 중 가장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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