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하느님의 사랑

MonteLuca12 2019. 5. 20. 13:36

 

 

예전부터 매미우는 소리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저도 슬퍼서 우는 것이라 생각하니 연민마저 일었는데, 알고 보니 구애의 방편이라 한다. 싫은 표현을 대놓고 할 걸 그랬다. 사랑을 구하는 노래라는 것이 땡볕에 물을 들어붓는다. 사우나독 안에서 바짝 달궈진 돌에 종지 물 떠 붓는 것과 흡사하다. 옥수수 밭이 주는 답답함을 모르면서 시골의 여름을 논하기는 어렵다. 조밀함에 습기가 더해지면 숨막히는 화생방훈련의 '가상현실체험'이 된다. 감자 밭 고랑에 뒹구는 돌멩이가 태양의 열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자칫 터질 것 같아 옆에 가기가 겁난다. 자갈투성이의 좁은 신작로는 하루 한 번 지나가는 달구지 같은 버스에게 깡마른 몸을 억지로 내준다. 염치없는 막걸리 차가 불쌍한 이놈의 등때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밟아 재낀다. 신음소리 대신 신작로가 고통을 호소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있는 대로 바람을 일으켜 그놈의 방귀뀌는 구멍을 막을 정도로 먼지를 뒤집어 씌우는 거다. 지난 겨울방학에 있던 곳과는 시오리쯤 떨어진 공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래저래 외롭고 무료한, 내 처지만 애모하다.

 

예비고사를 보고 풀린 긴장이 살금살금 노는 재미를 가르쳐줬다. 서울교구 동창들과 어울려 교구청 인사길에 불법동행을 했다. 거기서 선물로 받은 것이 담배였다. 황금색 포장지 위에 새겨진 이름이 ‘청자’다. 이름과 색깔이 눈곱만큼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걸 괘념할 의사가 아예 없었다. 이미 담배 맛을 아는 친구들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소중하게 간직한 ‘푸른 빛깔의 자기’, 그놈이 엄청나게 큰 경을 치고 말았다.

 

고사리 손의 애기지를 끌어당기며 어머니가 주례한 의식은, 아들을 위해 바친 간절한 기도 중 하나였다. 사십이 될 때까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겠다는 철석 같은 언약을, 모자 사이에 맺었다. 술은 조금이라도 마시면 되돌아 나와, 그런대로 정상참작이 될 만한 위반이었다. ‘청자’는 달랐다. 오래가지 않아 가책감(呵責感)은 쪼그라들고 담배 맛은 덩치 큰 곰만큼 커져버렸다. 어머니와 대면하는 시간이 극히 짧고, 냄새 관리를 철저히 했다는 자위가, 그분이 알고 계실지 모른다는 걱정을 담배연기에 실어버렸다. 내 손가락에 문신된 어머니의 기도를 까맣게 잊었다.

 

내 생애 가장 길었던 그해 여름 어느 날, 작은 소포를 받았다. 그 안에서 가지런히 개켜진 속옷 몇 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내복 속에 새알처럼 들어앉아 있는 것은 다섯 갑의 ‘청자’다. 어머니와 맺은 언약이 사랑으로 바뀌어 여기 와 있다.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愛(사랑),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부분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한 영문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힌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하느님의 사랑은 끊임이 없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이사 49, 15-16) 요즈음 문신이 유행합니다.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표현은, 당신이 나를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 라는 뜻이므로, 나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자식을 잊어버릴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너를 잊어버리더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허물어져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먼지뿐일지라도, 하느님의 특별하고 믿음 가득한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사랑의 굶주림 속에서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더라도, 있지도 않는 것을 찾지는 마십시오. 그 대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개종을 예로 보겠습니다. 성인은 그 험한 산마루를 넘어왔습니다. 젊고 총명한 교사는 어떤 피조물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을, 피조물 중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 높은 곳을 바라다볼 용기를 얻던 날, 그는 마침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거리감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랑, 차원이 다른 사랑, 지칠 줄 모르는 사랑, 항구하게 지속될 사랑, 언제나 우리 손안에 들어있는 가까운 사랑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이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중 누구도 혼자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당신의 친아버지가 당신을 잊어버려서 화가 났더라도, 당신의 생각이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신앙체험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 속에 당신을 향한 하느님의 열정적 사랑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신앙체험입니다.(1)(2)

(1) Vatican News, "Udienza Generale 20 Febbraio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February 20, 2019, https://www.vaticannews.va/it/papa-francesco/udienza-papa/2019-02/udienza-generale-20-febbraio-2019.html.

 

(2) Virginia Forrester, "Pope at General Audience on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February 20, 2019, https://zenit.org/articles/pope-at-general-audience-on-jesus-way-to-pray-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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