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在天吾父

MonteLuca12 2019. 5. 18. 21:33

 

해외여행으로 치면 호랑이가 금단현상에 시달릴 정도쯤 되는 시절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에 도착한 것은 이경이 가까워서였다. 몬테 피올로(Montefiolo), 올리브나무로 둘러싸인 이 작은 산은, 고색이 철철 넘치는 수녀원 건물을 털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2월말 밤공기가 못 견딜 만큼은 아니라 다행이다. 시간은 벌써 삼경의 문턱에 닿아 있었지만, 산골 마을 카페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그곳 사람들이 담근 맥주를 마셨다. 그 짜릿한 맛은, 아쉽게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별무리의 기억에 묻혀버렸다.

 

오늘 새벽미사에서 부른 성가가 자꾸 입 속을 맴돈다. 선율은 단순하지만, 가사는 평범하지 않다. “무변해상 별이시요보이소서, 성마리아영원무궁 즐기리다.” 누가 노랫말을 지었는지 참 잘 어울리게 성모님을 그렸다. 운율이 가사의 맛을 한껏 높인다. 별의 추억은 한 바구니에 그득 차있다. 뉴질랜드 남단 퀸즈타운의 밤하늘은 남십자성을 가운데 두고, 온통 별로 채워진 모자이크畵다. 캐나다 동부 무스코카 호수는 자기가 흠뻑 품은 코발트 물감을, 하늘 가득 차 있는 별을 향해 쏘아 댄다. 달은 내게 참 고마운 별이다. 큰 달이 뜰 때면 어김없이 까마득 먼 수평선부터 우리집 턱밑 백사장 끝까지 길고도 긴, 길 하나를 바다 위에 닦아 놓는다. 내가 자라면 가고 말겠다며 벼르던 그곳을 알려주던 길이다. 그 길을 아리조나 파월호수에서도, 호주 동쪽 골드코스트 해변에서도 보았다. 빳빳한 종이에 그 기억들을 그려 넣고, 접지도 개키지도 않고 가슴에 묻었다.

 

27년 전에 만났던 몬테 피올로의 할머니 수녀님들이 생각난다. 며칠 묵으며 쌓은 정이 이렇게 오래도록 가시질 않는다. 로마에 나간 김에 사다 드린 달콤한 식후주를, 저녁기도 후에 모여 앉아 바느질하면서 홀짝홀짝 드시던 수녀님들은, 그때 모습 그대로 하느님 나라에 잘 계시리라 믿는다. 또 오겠다며 써 드린 약속어음에, 처음부터 부도’라는 수식어를 붙여 두었다. 나는 거기서 육시경과, 구시경의 맛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모르는 글이지만 그걸 이겨내고 함께 바친 기도 속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셨다.

 

새 쪽을 편다. 뉴스를 따라가며 교황님을 곁눈질하다 욕심이 생겼다. 멀리 가서 찾는 수고를 보태, 교황님의 교리교육(Catechesis)의 무단 청강생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자여!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며…” 천주경」 맨 앞에서 시작한다.

 

在天吾父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전각: 작가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주님의기도」 첫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리교육을 3회에 나누어 싣는다. 영어판 Vatican News에는 동영상만 실려있는 교육내용으로,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하여 게시한 영문텍스트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혀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

모든 신자들이 이 기도를 할 때, 첫 단계로 해야 하는 준비는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신비를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앵무새처럼 말만 따라하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인식하는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면, 기도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려면 이 신비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그리고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는 걸러서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마음의 정화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 왔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상이나 어머니상과 관련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779).

우리 중 아무도 완벽한 부모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결코 완전한 부모나 사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우리는 항상 한계의 벽에 가로막혀 있고, 이기주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삽니다그래서 종종 다른 사람을 차지하거나 조종하려는 욕구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때로는 사랑의 표현이 분노와 적개심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바로 전주에 그렇게도 깊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죽도록 미워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이런 모습을 거의 매일 보게 됩니다우리 안에 예외없이 뿌리내리고 있는 독한 마음이, 선의를 누르고 악마의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부모님을 떠올리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단지, 인간적 관계의 아버지,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으로서, 그 사랑에 맛들이도록 우리를 부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불완전하게 누릴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영원히 사랑에 목말라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구하고,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받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맙니다.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정과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1)(2)

(1) Vatican News, "Udienza Generale 20 Febbraio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February 20, 2019, https://www.vaticannews.va/it/papa-francesco/udienza-papa/2019-02/udienza-generale-20-febbraio-2019.html.

 

(2) Virginia Forrester, "Pope at General Audience on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February 20, 2019, https://zenit.org/articles/pope-at-general-audience-on-jesus-way-to-pray-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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