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하느님, 저의 희망

MonteLuca12 2019. 5. 22. 15:58

 

안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맛있는 물을 먹고 자랐는지 안 것은 집을 떠난 다음이다. 우리집 닭은 참 고은 노래를 불렀다. 여명 알리미, 닭우는 소리에 대한 환상은 얼마전 동남아 여행 중에 깨졌다. 아침마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달걀을 상납받았으니 우리 닭만 예뻣는지도 모른다. 사랑도 고마움도 다 제 잇속 차림이다. 어머니는 구정물 처리를 위해 돼지도 한 마리 키웠다. 냄새는 좀 났지만 덩치가 산 만한 녀석은 성당너머 우리 밭에 뿌릴 거름을 부족하지 않게 생산했다. 단차가 있는 뒤뜰의 윗단에는 작은 소대 규모의 장독대가 한결같이 점호를 준비한다. 단층 둘레의 장식은 채송화와 봉숭아의 몫이다. 나팔꽃과 맨드라미, 호박꽃이 주인이었지만 양귀비꽃도 손님으로 함께 살았다. 성당에서 흘러내린 비탈의 경계에서 시작한 우리집 후원은 작은 정원이었다.

 

아내의 인내는 늘 시험을 치른다. 내가 집만 팔면 가격이 오른다. 그냥 오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림을 시작해서 아이 낳고 살던 강남의 그 동네는 열배 넘게 뛰었다. 두 채나 그랬고, 약속이나 한 듯 팔자 마자 그런다. 경품추첨에도 한번 못 붙었을 때 알아본 징조다. 그놈의 돈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을지로 안쪽 길을 혼자 걷는다. 배나 채울 양으로 냉면집엘 들어갔다. 질기지도 않은 냉면이 목에 걸린다. 시장 바닥 드럼통 식탁에 앉은 나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녹말국수를 먹고 있었다. 어머니가 앞에 계셨지만 냉면은 한 그릇이다. 어머니 머리 속은 집 앞에 찾아와 떼거지쓰는 인부들의 얼굴로 가득 찼다. 누나는 월사금 고지서를 들고 아버지 공사대금을 체납한 인정머리 없는 아저씨 집으로 갔을 게 뻔하다.

 

딸 부잣집의 서까래는 늘 웃음소리의 진동으로 흔들렸다, 외로이 바다 가운데 앉아 있는 섬 주인, 새들도 거기까지 날아간 누나들의 합창을 들었을 것이다. 위병소 초병처럼 무리에서 떨어져, 처마 밑에 홀로 서있는 장독은, 냉면이 될 검은 가루를 잉태 중이다. 품고 있는 감자가 썩기를 기다린다. 그 뚜껑에 소복이 쌓인 눈모자 위로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제법 많이 자랐다.

 

옛날 맛이 아니라고 냉면을 타박하며 내린 버스 정거장은, 벌집 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군상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아파트란 괴물이 이 나라 땅을 온통 휩쓸고 있다. 불과 반세기 전의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없다. 태어나 자라던 고향집이 그립다. 그런 게 사람 같이 사는 건데... 인부들에게 줄 노임이 부족해 어깨가 처진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다. 해결 해 주실거다!”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을 말씀드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望(소망),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作

 

「주님의 기도」 중,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에 대한 교황님의 교리교육 두번째 부분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의 영문 번역 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힌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2)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드릴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지나치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은 우리 보다도, 우리를 더 많이 아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신비스러운 분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시편 139, 1-4) 하느님은 자녀들에 관한 모든 것을 한눈에 이해하는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들이 행복한지 슬픈지, 진실한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지를 다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그의 섭리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을 말씀드릴 필요조차 없습니다저는 당신께서 제 곁에 계실 것을 청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저의 희망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직후,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앞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가르치시고, 여기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마태6,31) 모순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 자체가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고 망설임없이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1)(2)

(1) Vatican News, "Udienza Generale 6 Marzo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March 6, 2019, https://www.vaticannews.va/it/papa-francesco/udienza-papa/2019-03/papa-francesco-udienza-generale-padre-nostro-regno-mitezza.html#play.

 

(2) Virginia Forrester, "General Audience: Pope Reflects on 'Thy Kingdom Come'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March 6, 2019, https://zenit.org/articles/general-audience-pope-reflects-on-thy-kingdom-come-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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