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사랑의 약점

MonteLuca12 2019. 5. 19. 15:26

 

 

‘펀치볼’, 매우 낯선 지명이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고, 삼엄한 경계 속에 갇힌 곳, 분단의 냄새가 짙게 나는 남쪽 땅 최북단에 있는 군사시설이었다. 미군 종군기자가 자기 나라의 화채그릇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여준 ‘해안분지’라는 것을 몰랐다. 그 펀치볼에서 남쪽으로 사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짐을 풀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인제군 서화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펀치볼까지 가기가, 그것이 속한 양구군의 주읍 보다 훨씬 가까웠다. 사상 최고의 혹서라고 떠는 호들갑은, 숫자를 보고 부리는 엄살이지 싶다. 제법 북쪽이지만 그곳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다. 공소 대문을 나서던 발걸음이 유격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포병 대열의 허리춤 앞에서 막혔다. 그 많은 장병 중 가장 많이 지쳐 보이는, 두 명의 병사는 안타깝게도 내 일년 선배들이다. 그날 이후 맞는 주일 공소예절은 초주검에서 조금 깨어난 선배들과 함께 했다. 군복무가 아니라 방학 중 선교파견으로 여기 온 것에 안도하는 마음의 꼬리에, 살짝 미안한 생각이 묻었다. 소임을 마치고 귀환한 인제성당의 종탑에, 지던 해가 깃봉처럼 꽂혀 있다. 그 밑에 걸린 깃발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삼팔선이 그어진 곳에서 군축령 아래까지 오는, 4킬로미터 가량의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덕이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털털거리는 비포장 길을 몇시간째 달려온 버스가, 여기서는 철로 위의 고속열차처럼 빠르고 조용했다. 오아시스가 이런 맛일까? 소양댐에서 갈 길이 막혀 되돌아온 물이 그 오아시스와 짧은 행복을 묶어 비정하게 삼켜버렸다. 10여분의 안락한 주행은 바로 험준한 오르막 길을 만난다. 군축령 고지에 올라서면 인제읍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내 눈의 조리개를 딱 맞게 조절해 머물게 하는 것은 단연코 성당의 종탑이다.

 

아버지는 동명동성당을 짓고나서, 꼭 2년 만에 인제성당의 종탑공사를 지휘하고 계셨다. 종탑 꼭대기에서 귀에 손을 대고 모아 듣던 소리는, 원파트리치오 신부님의 보기 드문 외침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과묵한 신부님이 ‘과묵그룹’의 절친 멤버, 장말딩 회장의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게 한 것은 아들의 출생 소식이었다. 내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의심은, 그날 저녁 두 분이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셨을 말씀이다. 그 놈은 하느님께 바칠 이사악입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그놈’은 아버지 마흔 둘에 얻은 늦둥이 외아들이다.

 

가난한 집 딸 시집보낼 때 싸는 만큼의 보따리를 화물차에 실어 신학교로 보내던 날,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그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함께 계심을 믿는다. 나는 여기서 같은 ‘아버지’를 뵙고 산다.

 

有愛 (사랑; 1코린, 13, 13)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리교육의 두번째 부분이다. 영어판 Vatican News에는 동영상만 있어,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한 영문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혀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2)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신’은 가장 비극적으로 묘사됩니다. 천사 같은 존재인지 악마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화에 나타난 그는, 가난의 여신 페니아(Penia)와 풍요의 신 포로스(Poros)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양쪽 부모의 인자를 다 지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이 신화에서 우리는 인간적 사랑의 양면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만개하여 화사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다가, 금방 시들어 말라버리는 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손에 넣은 모든 것이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플라톤의 「향연」 203). 예언자 호세아는 사랑의 선천적 약점을 가혹하게 표현합니다.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호세 6, 4) 우리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지키기 힘든 약속, 곧 말라버리고 허사가 되어 버리는 노력, 그것은 마치 아침에 해가 뜨면 밤새 맺힌 이슬이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약하고 간헐적인 것이었는지 돌이켜 보십시오. 사랑이 식어가고 약해지는 경험을 다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를 가로막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이겨낼 힘이 약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한계의 벽은, 평소에는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실지로 베드로 사도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약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신을 추락시키는 약점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찾고 있던 것을 결코 완전하게 찾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 거지 신세들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여기에 또다른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없이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조차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전대미문의 가설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사랑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십니다.(1)(2)


(1) Vatican News, "Udienza Generale 20 Febbraio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February 20, 2019, https://www.vaticannews.va/it/papa-francesco/udienza-papa/2019-02/udienza-generale-20-febbraio-2019.html.

 

(2) Virginia Forrester, "Pope at General Audience on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February 20, 2019, https://zenit.org/articles/pope-at-general-audience-on-jesus-way-to-pray-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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