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31

마지막으로 바친 기도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버스 뒷좌석에서 성가를 부르는 어린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가사가 약간씩 깨지지만 음정은 비교적 정확하다. 장례식장에서 발인하기 직전, 나와 함께 연도를 바치는 아내의 옆에 어린 조카가 붙어 앉아, 자기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아이가 혼자 위령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오늘 이 세상 떠난’(502번)을 다 부르고 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227번)를 다시 시작한다. 인터넷기반의 디지털 미디어가 넘쳐난다. 언론을 못 믿겠다는 불만의 기억이 제법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가 바뀌어도 정권이 뒤집혀도 그저 그 턱이지 싶다. 그 틈을 비집고 소식전달자들이 콩나물 시루에 가득하다. ..

순수한 바람

저녁 식사자리에서 농담으로 주고받은 말이 씨가 되었다. 비행기 타는 것이 귀찮다는 푸념으로부터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중고차를 사서 끌고 다니다가 돌아갈 때 팔아도 손해가 없겠다는 의견이 제일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술안주 역할은 톡톡히 했다. 코치를 타는 방안을 제치고 「암트랙」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자 마자, 우리는 새로운 계획의 첫 단추를 끼웠다. 내일 아침 출발하는 일정을 몇시간 앞두고 과감하게 바꾼 것이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항공권을 취소하고 기차표를 예약했다. 모험을 선택한 용사의 웃음을 밤하늘로 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광화문 앞을 지나가기로 계획된 자전거 행렬이 안국동에 이르렀다. 예상치도 못한 난감한 사태가 벌어졌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파출소에 잡혀 들어간 우리는 단체로 준비한 유..

깨어 있어라

밤바다가 전혀 조용하지 않다. 어디서 쏘는 것인지 굉장히 밝은 빛줄기가 세 개는 되나보다. 발전시설이 넉넉하지 않은 시절임에도 엄청난 양의 전기를 태워 소방차 물 쏘듯 하늘과 바다 속으로 쏟아 붓는다. 차분히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가거나, 시간을 정해 놓고 꼭 봐야 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정신 나간 놈 널뛰듯, 조자룡 헌 창 쓰듯 제멋대로 天宮과 海表 사이에서 휘둘러 댄다. 마루와 앞마당을 갈라주는 유리문을 통과한 빛이, 방과 마루의 경계를 정해 놓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온 식구가 필통 속 연필처럼 나란히 누워있는 우리집 방을 허락도 없이 훑고 나가버린다. 벽에 걸린 십자가는 천장 가운데로 순간 이동했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 밑에 걸린 예수성심 상본이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가 눈 깜..

항상 우리와 함께

엄하기로 말하자면 허신부님을 따를 분이 없다. 아랫집에 사는 우리에게 흘러내려오는 소문을 통해 들은 일화가 수북하다. 대신학교에는 ‘라틴과’라는 특별한 과정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는 학생들은 1년간 라틴어만 배워야했다. 신학생 대우는커녕 고등학생보다 더 어린애 취급을 당했다는 후일담이 참 다양하다. 교단에서 던진 분필이 책상 위의 병을 맞춰 잉크를 뒤집어썼다거나, 분에 못 이겨 찬 교탁에 발이 끼인 신부님을, 모두가 달려들어 빼 드린 이야기가 증언집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안용지’라는 것을 처음 봤다. 아무리 입사한지 일주일 된 풋내기라는 것을 감안해도, 원고지 두 장 분량의 내용을 완성하는데 하루가 걸린 것은 너무했다. 그 정도의 글을 라틴어로 쓰라 했어도 그닷하진 않았을 것 같다..

하느님은 우리 편

성산대교의 북단 램프를 돌아 올라가면서 말문을 떼신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저녁이면 부평까지 회장님을 뵈러 가는 것이 계절을 건너왔다. 건설 중에 교각이 무너져 통행이 막혀버린 행주대교가 원망스럽다. 돌아서 가는 길이 족히 30분은 더 잡아먹는다. 회장님의 기분이 조금 나아 보인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부담 드리지 않겠다고 애쓰시는 마음이 빤히 읽힌다. 엉망이 된 장을 대신하기 위해 매달려 있는 부속들이 침대둘레를 덮고 있다. 아직 안심할 상황이 못된다. 돌아 가자고 일어서는 신부님이 차에서 했던 말씀을 되풀이하신다. 재생되는 음질이 좋지 않다.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만감에 짓눌려 음량이 크게 떨어진 걸 나는 알고 있다. 입주를 앞두고..

본조르노 파파!

나는 초동(樵童)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걸 제치고 다수결로 정해진 이름이 ‘은사시’다. 철이 살짝 든 까까머리 중3 다섯명이, 주일 오후 모처럼 쉬는 시간을 쪼개, 청소도구를 두는 작은 방에 모였다. 역적모의하듯 어두컴컴한 곳에 함께 있다가 헤어지기를 얼마나 감쪽같이 했는지, 밤낮을 비비며 사는 우리 반 친구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한 것은 단지 알량한 염치 때문이지, 실제로는 기특한 글짓기 모임을 갖고 있었다. 운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도 간혹 썼지만, 형식이 없는 산문을 나누어 읽고 헤어질 뿐, 대단한 만남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건만 허락됐으면 다섯 중에 하나는 솜씨 좋은 글쟁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신학교의 교지 이름이 「알마 마뗄」(Alma Mater)이었다. ‘母敎..

달의 신비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지나가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기가 아까울 것 같다. 재스퍼에서 밴프로 내려오는 93번 도로의 이름이다. 만약 어렵다면 천국에 바로 가기 위해 기를 써야할 거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감동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그 길을 가기 위해 재스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곳의 아담한 성당 안이다. 앞줄에 앉은 아이들이 지루해서 몸살이 났다. 사내아이 사형제가 한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으니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세 살이 못돼 보이는 막내는 쉬지 않고 엄마 품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일곱살은 되었을 큰 녀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감금되어 있다. 무려 여덟 명이다. 한가족이 한 줄을 그득 채웠다. 눈치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어쩐지 생소하다.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수줍..

세리의 기도

Cor dulce, cor amabile! 사랑하올 예수성심이여! 성모님의 달 5월이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어졌다. 사랑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계절을 연이어 산다. 봄의 몸통이 여름에게 자리를 내준 것은 예수성심의 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생각이 엿보인다. 당신의 백성이 늘어난 것 뿐만 아니라, 자꾸만 커져가는 사랑의 갈구에 맞추어 예수님의 성심이 점점 뜨거워진다. 육십 중반의 노인들이 주책이다. 사진만 찍으려면 애들 짓을 한다.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모아 심장을 만들더니, 요즘엔 양손을 벌려 손가락 끝으로 두개를 만든다. 감수성이 뛰어나다. 어려서 안방에 걸린 큼지막한 예수성심 상본을 보며 자란 내 몸에는 결코 배지 않는 손짓이다. 그 주책도 6월에 들어서니 의미가 살아난다. 예수님의 성심은 “..

공감과 연대

붉은 제의를 볼 때면 심장을 흔드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이 유별난 감정에 예외없이 붙어 다니는 운률은 복자찬가(福者讚歌)다.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 대신학교의 새내기 우리반은 이 성가와 함께 끓는 피를 몸으로 토했다. 신학교의 역사에 새 장을 연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탄압하기 위해 위수령이 선포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소신학교는 방송청취나 신문구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그날 아침에 본 것은, 우리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문리대 운동장에 주둔해 있던 장갑차의 대열이었다.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국가의 운명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표현과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 땅에 ..

필요한 것을 구하라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어에 눈뜬지 1년밖에 안된 햇병아리에겐 엄청나게 무거운 짐이다. 신학교의 1년 짬밥은 대단하면서도 별거 아니었다. 요령이 통하는 틈새가 극히 좁았지만, 그런 걸 찾았다 해도 혼자만 누리라고 감싸줄 덮개가 빤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힘들게 느껴지는 두번째 해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의 작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큰 바위가, 갑자기 날아든 뉴스로 뒤엎어졌다. 서울교구장에 새 주교님이 임명되었고 그분은 우리학교 교정을 착좌식장으로 정하신 것이다. 주교님은 착좌 미사가 봉헌된 후 일주일 간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당신 신학교생활의 경험담을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셨다. 그분은 그후 꼭 1년만에 같은 자리에서 추기경 서임 미사를 집전하신다. 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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