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동(樵童)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걸 제치고 다수결로 정해진 이름이 ‘은사시’다. 철이 살짝 든 까까머리 중3 다섯명이, 주일 오후 모처럼 쉬는 시간을 쪼개, 청소도구를 두는 작은 방에 모였다. 역적모의하듯 어두컴컴한 곳에 함께 있다가 헤어지기를 얼마나 감쪽같이 했는지, 밤낮을 비비며 사는 우리 반 친구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한 것은 단지 알량한 염치 때문이지, 실제로는 기특한 글짓기 모임을 갖고 있었다. 운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도 간혹 썼지만, 형식이 없는 산문을 나누어 읽고 헤어질 뿐, 대단한 만남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건만 허락됐으면 다섯 중에 하나는 솜씨 좋은 글쟁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신학교의 교지 이름이 「알마 마뗄」(Alma Mater)이었다. ‘母敎’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바로 윗반 선배의 추천으로 교지 편집부에 끌려들어가 심부름을 했다. 기라성 같은 석학, 교수신부님들 원고를 교정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지만, 간혹 선배들의 문장을 손대기도 했다. 깡촌에서 상경한 중국집 보조처럼, 교지 한권 출간하는데 따라 다닌 것이, 책 만든 경험의 전부다. 그걸 끝으로 교지는 폐간됐고 나는 학보사로 잡혀갔다.
樵童은 ‘나무하는 아이’다. 원래 내가 마음 속에 품었던 뜻은 ‘꼴 베는 아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옹기골 친척집에 가던 날, 자기보다 몇배는 큰 뭉치의 소여물을 지고 돌아온 내 또래의 벙어리 소년과, 그 아이의 지게에 대한 기억이 뇌세포의 옆구리에 붙어 아직도 살아있다. 그날 밤, 그 아이가 사는 시골집 호롱 밑에서 쓴 일기는 재가 되었지만, 한 줄의 글이라도 쓸라치면, 어김없이 그 소년의 얼굴이 종이에 서린다.
남들은 윤전기를 돌려 신문을 찍을 때, 가난한 우리는 활판인쇄기에 붙어 있었다. 그래도 거기엔 정감이 담겨있다. 植字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한번 감긴 돼지꼬리 교정부호도 존재 이유를 잃었다. 납덩이 글자를 심지 않으니 그런 실수도 생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신문은 교지에 비해 가볍지만 생동감이 있다. 해학과 정감이, 충고와 예리한 필봉의 동거를 허락한다. 신학교라는 좁은 사회가 담아내는 지면의 규격이, 어느 학교의 그것 보다 넓다. 재미가 있었지만 모래톱과 산호초가 가득한 바닷가처럼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뻔한 말에 속고 산다. 슬쩍 핑계를 팔아 구실을 챙긴다. 돌이켜 보면 평생을 그랬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 그 안에 적어 둔 말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잡아준 손에 이끌려 오다 보니, 내다 버리기 아까운 원고 뭉치가 한줌 잡힌다. ‘은사시’ 나뭇잎 흰털에 감춰두었다 버리고 온 글자들이 때로는 보고싶었다. 나이 더 들면 추억하는 기력도 떨어질 것 같아 종이에 새겨 두기로 마음먹었다. 뻔한 빈말을 "등 떠미는 것"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천으로 덮어버렸다. 모른 척하는 뒷머리가 뜨겁다. 젖비린내 나는 내 글을, 아닌 척 빼놓지 않고 읽으셨던 박상래 신부님께 한 권 드리고 싶지만, 기도로 쓴 편지나 한 통, 하늘로 보내야겠다.
남는 시간을 다 어데다 쓰랴? 편집 프로그램 공부로 시작했다. 전 과정을 인디(Indie)출판으로 했으니 문고판의 냄새가 물씬 난다. 혼자서 하는 생각이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이고 내게 주신 성소를 자꾸 뿌리치려니 너무나 송구해서 저지른 짓이다.
아침마다, 차 한잔 마시며 교황님을 뵙는 거다. 오늘도 아침인사를 드린다. “본조르노 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