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하기로 말하자면 허신부님을 따를 분이 없다. 아랫집에 사는 우리에게 흘러내려오는 소문을 통해 들은 일화가 수북하다. 대신학교에는 ‘라틴과’라는 특별한 과정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는 학생들은 1년간 라틴어만 배워야했다. 신학생 대우는커녕 고등학생보다 더 어린애 취급을 당했다는 후일담이 참 다양하다. 교단에서 던진 분필이 책상 위의 병을 맞춰 잉크를 뒤집어썼다거나, 분에 못 이겨 찬 교탁에 발이 끼인 신부님을, 모두가 달려들어 빼 드린 이야기가 증언집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안용지’라는 것을 처음 봤다. 아무리 입사한지 일주일 된 풋내기라는 것을 감안해도, 원고지 두 장 분량의 내용을 완성하는데 하루가 걸린 것은 너무했다. 그 정도의 글을 라틴어로 쓰라 했어도 그닷하진 않았을 것 같다. 며칠 후 부장이란 분이 부르더니 일하고 싶은 부서가 따로 있는지 묻는다. 그 양반 입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짝에 성에꽃처럼 오한이 피어오른다. 천하제일의 숙맥을 두고 무슨 말을 하랴? 경제도 경영도 배운 적 없고, 理에도 工에도 생무식쟁이가 국립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대한 기업화타당성 분석을 하는, 살벌한 경쟁판에서 피가 튀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는 소신학교에서 5년이나 라틴어를 배우고 올라갔지만,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라틴과가 없어진 이후라 기초과목으로 정해 놓은 이 어려운 말을 의무로 수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서 일하고 오후 다섯시에 온 놈과 똑같이 한 데나리오만 받은 일꾼들의 불만을 편들고 싶다. 다시 공부하는 것이라 거저 먹기일 거라며 주고받은 위안도 허탕이었다. 라틴어 대신 우리말을 하면 쇠덩어리를 들고 다니는 벌을 받은 시절이 있었다 한다. 그 때를 사신 신부님이 들으시면 웃을 일이지만, 초등학교 때처럼 매일 내주는 숙제가 잠자코 있는 신경의 꼬리를 자꾸만 건드린다.
대통령의 시해사건이 몰고온 혼란기에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그 크고 중요한 기관을 책임진 수장의 목숨도 추풍낙엽이었다. 참으로 절묘한 인연이다. 거기서 살아남은 나는 5년 경력의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하루아침에 자리를 빼앗긴 소장님을 따라 대기업의 기획실로 옮겨갔다. 진정한 격랑의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덩치를 부풀린 ‘짬밥’이, 사이즈가 큰 세련된 통으로 옮겨질 무렵, 어릴 적 앞바다의 서치라이트처럼 허신부님의 생각이 머리를 휘젓는다.
나는 숙제장 오른 쪽 모서리에 ‘次葉’이라고 썼다. 수업이 끝나고 신부님이 부르신다. 못마땅한 표정을 그리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신 걸까? 그 분이 일러주신 것은 라틴어가 아니라 한자다. “다음 쪽에 계속된다는 말은 ‘次帳’이 나을 것 같다.” 오로지 그것 만이 아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은, 배우고 터득해 살아가는 원리였다.
「주님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에 대한 교황님의 교리교육 두번째 부분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한 영문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힌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2)
예수님 삶 속에도 시험과 유혹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은 완전히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거의 스캔들 같은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청원이 가장 어려운 것들입니다. 위의 복음구절들(1)은 이 청원들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수난하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줄곧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즐거울 때나 고통을 당할 때에도 함께 계셨고, 슬프거나 실패했을 때에도,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조차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버리실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모든 물질적인 것들과 사람들 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이 유혹에 맞서 싸우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사실에 대한 증언이 몇몇 복음의 앞부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사막으로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옛날 이야기인 마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마귀는 이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가르쳐주는 것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탄과 대면하셨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고,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과 악마의 결투가 끝나는 것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 (2)(3)
(1)[역자 주] 앞의 문단에 나오는 성경 구절로 어제 올린 부분에 있음
†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야고 1,13)
†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루카 11, 11)
(2)Vatican News, "Pope Francis General Audience of 1 May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May 1, 2019, https://www.vaticannews.va/en/pope-francis/papal-audience/2019-05/pope-francis-general-audience-1-may-2019.html.
(3)Virginia Forrester, "Holy Father Addresses 'Our Father' at General Audience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May 1, 2019, https://zenit.org/articles/holy-father-addresses-our-father-at-general-audience-full-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