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달의 신비

MonteLuca12 2019. 6. 1. 17:15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지나가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기가 아까울 것 같다. 재스퍼에서 밴프로 내려오는 93번 도로의 이름이다. 만약 어렵다면 천국에 바로 가기 위해 기를 써야할 거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감동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그 길을 가기 위해 재스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곳의 아담한 성당 안이다. 앞줄에 앉은 아이들이 지루해서 몸살이 났다. 사내아이 사형제가 한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으니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세 살이 못돼 보이는 막내는 쉬지 않고 엄마 품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일곱살은 되었을 큰 녀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감금되어 있다. 무려 여덟 명이다. 한가족이 한 줄을 그득 채웠다. 눈치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어쩐지 생소하다.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수줍어 되돌리는 둘째와 셋째의 눈이 참 예쁘다.

 

영성체가 끝나고 성작을 닦던 신부님의 몸짓이 부산하다. 앞에 앉은 할머니의 고발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내 옆을 지나 거의 맨 뒷자리로 이어지는 단출한 행렬속에, 걸음걸이가 편치 않은 할머니가 앞장서고 사제가 뒤를 따른다. 성체를 영하지 않고 손에 모시고 갔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된다. 뒤를 돌아보는 시선들 때문에 용의자 바로 앞에 앉은 내 얼굴이 잠시 경련을 일으킨다. 상황은 쉽게 무혐의로 끝난 것 같다. 성가가 끝나기 전에 귀가를 서두르는 눈이,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훔쳤다. 가끔 보던 2급 단골손님은, 그래도 퇴장성가 2절을 꿋꿋이 부르고 있었다. 한 인터넷커뮤니티에서 촉발된 성체모독 사건 때문에 할머니도 민감해지셨나 보다.

 

재스퍼 성당에서 만난 사형제는 내 친구와 개구장이 경쟁상대가 될 만했다. 왜 제의실에 안 가고 고해소 앞에 있었는지 지금도 이유를 모른다. 마루바닥 성당에 낮은 무릎자세로 꿇어앉은 친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찍접댄다. 나는 수비전문이다. 역할분담일 뿐 장난의 파트너다. 잠시 후 내 옆의 공격수는 번쩍 위로 들어올려졌다. 연잎만큼 큰 손이 그 개구장이의 귀를 잡고 있었다. 고해소를 뛰쳐나온 신부님은 성난 돈까밀로였다. 그 친구는 평생을 쉬지 않고 달려와 은퇴를 바라보는 사제로 살고 있다.

 

200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지나며 본 것을 적으려면 일주일 연재로 부족하다. 보우써밋에서 내려다보는 페이토레이크의 물색이 탄성을 자아낸다. ‘코발트 블루라고 하는데 탐탁하지 않다. 처음에 왔을 때는 또다른 색깔이었다. 스미는 생각이 복잡하다. 심혈을 기울인 하느님의 작품에 인간이 토를 달으려 애쓴다. 우리의 재주를 가지고 실제보다 멋있게 묘사하려는 시도가 그분 보시기엔 어떨까? 성전에서 지겨야 할 예절규범을 우리의 색깔로 덧칠한 건 아닐까? 눈총과 질타가, 한 줄을 메우는 삼대(三代)의 모습을 성당에서 몰아낸 건 아닐까? ‘경건살벌은 각기 다른 사전에 실려야 할 단어다.

免我之債  (면아지채;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作

「주님의 기도」 두번째 부분의 네 개 주제 중, 두번째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에 대한 교황님의 교리교육의 나머지 부분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한 영문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힌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2)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성전에 서있던 세리처럼 가슴을 쳐야 할 사연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 요한은 첫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속이고 싶다면 죄가 없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빚쟁이들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이 모두 거저 받은 것입니다. 내 존재 자체가 그렇고 부모, 친구, 이 놀라운 우주만물 모두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우리의 삶이 은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 내신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빚쟁이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랑하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빛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신학자들이 말했던 달의 신비’(mysterium lunae)는 교회의 정체성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살아온 과정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러한달의 신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달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빛을 반영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이였을 때 미소 지어주었던 분들과, 미소에 응답하라고 일러준 분들 덕분에 배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은 여러분 곁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었고, 사랑 안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감옥에 갇힌 이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 마약 중독자 등등,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실수를 저지릅니다.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저지른 실수가 꼭 그렇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버려져서 저지른 잘못이라면, 양심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달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태양의 빛을 받지 못한다면 한겨울의 땅처럼 얼어붙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는 사랑의 고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섭리적 현존을 어떻게 느끼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항상 당신이 먼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들 중에 가장 거룩한 사람조차 당신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1)(2)

(1) Vatican News. "Pope Francis General Audience of 10 April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April 10, 2019. https://www.vaticannews.va/en/pope-francis/papal-audience/2019-04/pope-francis-general-audience-of-10-april-2019.html.

(2) Forrester, Virginia. "Holy Father’s General Audience: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April 10, 2019. https://zenit.org/articles/holy-fathers-general-audience-full-tex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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