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제의를 볼 때면 심장을 흔드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이 유별난 감정에 예외없이 붙어 다니는 운률은 복자찬가(福者讚歌)다.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 대신학교의 새내기 우리반은 이 성가와 함께 끓는 피를 몸으로 토했다. 신학교의 역사에 새 장을 연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탄압하기 위해 위수령이 선포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소신학교는 방송청취나 신문구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그날 아침에 본 것은, 우리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문리대 운동장에 주둔해 있던 장갑차의 대열이었다.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국가의 운명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표현과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 땅에 뿌려진 순교의 피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닫기 위해 사변(思辨)의 틀을 용감히 뛰어넘었다. 통금의 선을 넘어간 집회와 3일 간의 단식이 적지 않은 휴강으로 이어져, 첫해 겨울방학의 일부를 반납해 수업일수를 채웠다. 난방도 없는 추위를 순교자의 후예다운 패기로 버텨냈다.
5년전 8월, 광화문광장의 감격이 밀려온다. 오늘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인 것을 입당하는 사제를 보고 알았다. 그날 시복되신 124위 복자들을 기념하는 미사다. 교황님이 주례하신 시복미사의 감동을 제단 맨 앞자리에서 새겼지만, 오랜동안 흐릿해진 기억이 오늘 아침 짧은 강론에서 또렷이 되살아났다. 나는 1년 전부터 준비팀에 합류했다. 수없이 많은 회의에 참석하고 자원한 봉사자들을 교육했다. 준비기간이 길어지면서, 젯밥에만 관심있는 종갓집 어린 아들처럼 그냥 무난히 치러야 할 ‘행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뒤풀이의 대화 주제도 운집한 인파, 원활한 진행, 깔끔한 마무리, 그리고 국민적 관심의 깊이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의 순교선조들은 어쩌다 당고개 성지에 갈 때나 잠시 뇌리의 곁가지를 스친다.
「시복시성주교특위」 초대 위원장 박정일 주교님의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다. "124위 순교자 시복에는 특기할 만한 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 우리 순교자들의 시복이 2번 있었고(1925년에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과 1968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각각 로마에서 있었음), 이번이 세 번째 시복인데 한국에서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복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선교사들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이 주도했지만 이번 세 번째 시복은 우리 한국교회가 자체로 주도한 결과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1258호, 2014. 3. 30 참조)
앞서 두차례에 걸쳐 시복되신 선조들은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라 전세계가 공적으로 공경하고 있지만, 오늘 기념일을 지내는 124위 복자들은 우리나라 안에서만 공경하는 순교 선조들이다. 우리가 잊고 있으면 기억해 드릴 사람이 없다.
「주님의 기도」 중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에 대한 교황님의 교리교육 두번째 부분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한 영문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힌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2)
그리스도인이 기도 중에 청하는 빵은 ‘내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형제들을 위해 빵을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지 않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도와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빵을 우리가 서로 빼앗아간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공감과 연대의 기도인 것입니다. 내가 배고픈 것을 느껴야 많은 이들의 배고픔을 진정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야 그들의 기도가 하느님께 닿을 때까지 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신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요청을 모아 하느님께 가져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 저희는 모두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기도 중에 청하는 바로 그 양식으로 인해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과 빵을 쪼개고 나누는데 인색하면 우리에게 비난이 쏟아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양식을 몇 사람이 차지하는 것은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빵을 나누지 않는 이런 이기심은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 모두로부터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이가 한 명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겠다는 어린아이의 갸륵한 마음을 크게 부풀리셔서 많은 사람들의 배를 채우셨습니다. (요한 6,9 참조) 그 아이는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양식이 사유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양식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누는 섭리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진실은 빵을 많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기적을 행할 것이다.” 예수님은 아이가 내놓은 빵을 많게 하시면서, 성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체만이 끝없는 배고픔을 채울 수 있으며,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를 충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1)(2)
(1) Vatican News. "Pope Francis General Audience of 27 March 2019." Last modified March 27, 2019. https://www.vaticannews.va/en/pope-francis/papal-audience/2019-03/pope-francis-general-audience-of-27-march-2019.html.
(2) Forrester, Virginia. "Holy Father's General Audience: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March 27, 2019. https://zenit.org/articles/holy-fathers-general-audience-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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