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마지막으로 바친 기도

MonteLuca12 2019. 6. 6. 18:20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버스 뒷좌석에서 성가를 부르는 어린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가사가 약간씩 깨지지만 음정은 비교적 정확하다. 장례식장에서 발인하기 직전, 나와 함께 연도를 바치는 아내의 옆에 어린 조카가 붙어 앉아, 자기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아이가 혼자 위령성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오늘 이 세상 떠난’(502)을 다 부르고 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227)를 다시 시작한다.

 

인터넷기반의 디지털 미디어가 넘쳐난다. 언론을 못 믿겠다는 불만의 기억이 제법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가 바뀌어도 정권이 뒤집혀도 그저 그 턱이지 싶다. 그 틈을 비집고 소식전달자들이 콩나물 시루에 가득하다. 격식과 윤리의 한계가 모호하다. 이런 걸 자유라고 해야 할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기분이나 풀 양으로 여기저기 뒤적거린다. PDA라는 휴대용 컴퓨터가 스마트폰 앞 세대를 짧게 살았다. 언젠가 그 분야에 관심이 많은 신부님과 평화로운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신부님의 주장은 휴대전화가 그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확신이고, 나는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 가지 않아 승부가 갈렸고, 이름하여 스마트 세상이 왔지만 앞으로 어디까지 갈지가 매우 궁금하다.

 

프라더-윌리 증후군(Prader-Willi Syndrome)이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과 그저 조금 다른 모양의 염색체를 가진 것이, 이렇게도 모진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육신의 부자유를 타고 났지만 그 아이의 영혼은 천사처럼 깨끗하다. 따뜻한 엄마 품을 일찍 잃은 아이에겐, 할머니의 포근한 가슴이 세상에 하나 남은 안식처였다. 그 사랑의 보금자리가 떠나갈 것을 예감한 것일까?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장례미사 동영상을 열심히 보고, 이 성가를 외웠다는 이야기를 아내가 전해준다. 성가 만이 아니라 위령기도문도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아이의 가슴에 겨자씨조차 심은 사람이 없다. 늘 홀로 있는 아이, 누구와도 정상적으로 교감하지 않는 외로운 영혼이었다.

 

거기엔 거짓뉴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도덕과 환락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편협의 소치다. 거기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심장이 뛴다. 그 아이는 홀로가 아니었다. 바로 그 곳에서 예수님은 작고 예쁜 손을 잡아 주셨다. 그 분이 우리 옆에 늘 함께 계신다. 나는 슬픈 영혼에게 위로가 될 이름을 지어 두었다. 소화 데레사

 

阿們 (아문; 아멘),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作 

 

악에서 구하소서 (2)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눈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 악마가 대적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대라는 것과 하느님의 신비에 모순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연과 역사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마음 안에서까지 악마를 찾아 냅니다. 왜냐하면 악에 물들지 않았거나, 적어도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악이 무엇인지, 유혹이 무엇이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유혹을 받은 경험을 예외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유혹하는 자는 이것을 행하고, 이것을 생각하고, 그 길로 가라는 말로 우리를 악으로 끌고가서 밀어 넣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을 괴롭혀 온 악마에 대한 맹렬한 비난입니다. 그들이 악마의 간교한 유혹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아주 다양하여, 죽음을 바라보며 겪는 슬픔, 죄도 없이 당하는 억울함, 노예생활, 이웃에게 이용당하는 고통, 무고한 아이들의 울부짖음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다가,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의 마지막 말씀을 통해 밖으로 울려 나옵니다.

「주님의 기도」의 몇 가지 표현은 예수님의 수난이야기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살이 뚫리는 고통을 온몸으로 경험하셨습니다.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극도로 외로우셨을 뿐 아니라, 경멸과 굴욕을 당하셨고, 증오와 잔인한 학대,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분노까지도 경험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과 선한 것은 원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죄에 노출되고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종국에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을 때까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1)(2)

(1)Vatican News, "Pope Francis General Audience of 1 May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May 1, 2019, https://www.vaticannews.va/en/pope-francis/papal-audience/2019-05/pope-francis-general-audience-1-may-2019.html.

 

(2)Virginia Forrester, "Holy Father Addresses 'Our Father' at General Audience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May 1, 2019, https://zenit.org/articles/holy-father-addresses-our-father-at-general-audience-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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