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 안의 공기가 거짓말처럼 마음을 숙연하게 가라 앉힌다. 오후 다섯 시가 살짝 못됐는데, 성체조배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성체불이 되레 어두움의 농도를 짙게 하여, 감실을 바라보는 눈꺼풀을 닫아준다. 숙연이 경건으로 바뀌는 미세한 변화를 느끼며 신비의 영역에 진입한다. 검은 망막에 독경대와 해설대가 찍힌다. 거기에 한 젊은이가 서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봉사인가, 연기인가? 기도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제대 위아래를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관리인을 향해, 합주단 지휘하듯 손놀림을 연발하는 중년 남자는, 이 본당 사목회 총무이지 싶다. 나이 지긋한 총감독이 성당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다가 점잖게 총무를 부른다. 내기를 해도 이긴다. 그는 총회장이다. 성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신통한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성당이 자리잡은 터에서 뒤쪽으로, 족히 열 자(尺)가 넘게 단차를 두고 꽤 넓은 마당이 있었다. 직사각형 마당의 짧은 한 변을 차지하고 있는 콘센트 막사는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것이다. 주일학교 교실로도, 단체 회합실로도 쓰이지만 청년들의 탁구장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다용도 공간이다. 마당의 대부분은 배구코트가 차지하고 있지만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 것은 일년에 몇 번뿐이다. 우리는 강당 뒤편 언덕배기 소나무 숲에서 병정놀이를 했다. 그 안에 지휘본부와 보급창고를 지었다. 건축자재는 소나무 잎이었고, 나무 사이로 길을 낸 불도저는 우리의 낡아빠진 신발이었다. 늘 반복하던 칼싸움은 가상 적군을 상대하는 헛손질이었지만, 어릴 적 성당 친구들과 놀던 행복은 내 뇌리의 맨 밑에 가라앉아 썩지 않고 남아있다.
젊은이는 전례분과장이다. 그와 총무가 같은 사람이고, 회장의 얼굴은 나이먹은 총무다. 멀찍이 뒤에 앉으니 이제야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뭐하는 짓인가? 조배하는 사람들이 일하는데 방해된다고 나가주길 은근히 바라는 ‘위선자’들. 이들에겐 성탄의 의미보다는 멋진 행사가 훨씬 중요하다. 정작 축하받으실 예수님은 뒷전에 팽개치고 지들 체면만 생각한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처럼 신부님의 마음 끌기에 혈안이 됐다. 폼잡고 으시대고 자랑질하는 꼴이라니, 완장 찬 순사가 따로 없다. 자세히 보니 낯이 많이 익다. 내 얼굴도 망막 위쪽에서 얼른거린다.
턱과 목이 짧은 시차를 두고 파르르 떤다. 부끄러움과 후회를 털어내고 싶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그 진동으로 인해 물결처럼 머리속에서 퍼져 나온 것은 어릴 적 병정놀이를 하며 외쳤던 구호다. 신부님이 가르쳐 주셨다. 전쟁도 좋은데 이건 꼭 외우라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기도」 세 번째 주제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에 대한 교황님의 교리교육의 두번째 부분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한 영문텍스트를 필자가 우리말로 중역한 것임을 밝힌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2)
우리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어째서 이렇게 아버지의 나라가 더디게 오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비유로 당신의 승리를 이야기하십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왕국은 좋은 씨앗과 잡초가 함께 자라는 밭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실수는, 잡초로 여겨지는 것들을 세상에서 제거하는 일에 즉각 개입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달리 참고 기다리십니다.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방식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태 13, 24-30)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히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권력이지만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밀가루에 섞인 누룩과 같아서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가루 반죽을 부풀어오르게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태 13, 33 참조)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도 비유될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폭발적인 자연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큰 나무가 됩니다. (마태 13, 31-32 참조)
이와 같은 하느님 나라의 성격이 예수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동시대인들에게 비친 예수님은 약한 모습이었고 당시 공신력 있는 역사가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한 알의 밀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밀알은 땅에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12, 24) 씨앗의 비유는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느 날 농부는 땅에 씨앗을 심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를 매장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 27)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은 그것을 뿌린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마르 4, 27 참조)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그분 덕분에 성 금요일의 밤을 넘기고 온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우리의 죄와 실패 속에다 이 말씀의 씨앗을 뿌립시다. 우리는 이 기도를, 인생항로에서 실패하여 좌절한 사람들과, 사랑보다는 증오를 맛보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바칩시다. 또한, 정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 역사 속의 모든 순교자들, 그리고 대적할 힘을 잃어 마귀의 지배에 굴종하는 포기상태의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바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바친 「주님의 기도」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경의 봉인으로 두셨던 것과 같은 희망의 말씀, “그렇다, 내가 곧 간다”가 수도없이 반복되어 들려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대답입니다. “내가 곧 간다. 아멘.”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묵시22, 20)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기도는 묵시록의 이 말씀, “오십시오, 주 예수님!” 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간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매일같이 오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이루어 질 것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바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응답을 듣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1) Vatican News, "Udienza Generale 6 Marzo 2019," Vatican News, last modified March 6, 2019, https://www.vaticannews.va/it/papa-francesco/udienza-papa/2019-03/papa-francesco-udienza-generale-padre-nostro-regno-mitezza.html#play.
(2) Virginia Forrester, "General Audience: Pope Reflects on 'Thy Kingdom Come' (Full Text)," Zenit, last modified March 6, 2019, https://zenit.org/articles/general-audience-pope-reflects-on-thy-kingdom-come-full-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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