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키시스(Catechesis)

포용의 신학

MonteLuca12 2019. 6. 22. 20:49

 

열댓 명의 일주일 분량 김치가, 비닐로 된 비료포대로 하나 가득이다. 이것을 막대자루에 꿰어 둘이 걸머메야 이동이 가능한 양이다. 교구신학생 전원이 우리집 마당에 모여 여름 캠프를 출발한다. 각자 등에 진 배낭의 높이가 하나같이 한자 이상 머리위로 솟아 있다. 설악동을 출발해 천불동 계곡을 타고 대청봉을 넘어 오색에서 머물다, 양양과 주문진 사이에 있는 인구 공소까지 가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계획된 시간에 따른 순조로운 진행은 애저녁에 어그러진다. 출발 당일 첫 기착지를 오색으로 잡은 것 자체가 무리인 데다가, 설악동에 도착해서 비를 만났다. 이 빗속에 산을 오를 수 없어 비선대 산장을 빌려 첫 밤을 보내기로 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가파른 비탈을 내려간다. 의도된 극한체험도 아니지만 모험으로 치부하기엔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워낙 경사가 심할 뿐 아니라 길이 미끄럽고 칠흑 같은 어둠을 밝혀 줄 전등이 몹시 침침하다. 그 불빛 마저도 한 손으로 편하게 들고 갈 여유가 없다. 삼팔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엄습한다. 내 몸 가누기 어려우니 동료고 나발이고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짐은 무겁고 몸은 천근이다. 다리에선 불이 나고 가슴은 얼어온다. 조금씩 싹을 틔운 불평이 햇빛도 없는 야밤에 꽃을 피운다.

 

한여름 시골집의 구들장이 절절 끓는다. 동이 틀 무렵이 돼서야 방 하나에 포개 돼지새끼들처럼 잠에 빠진 우리를, 중천에 뜬 해가 간신히 깨운다. 통경하는 기도의 운율이 어긋난다. 서로의 눈길을 피한다. 밥맛을 돋우는 음악 대신 수저와 그릇이 부딪쳐 내는 금속음이 방을 가득 채운다. 흡사 침묵 피정하던 신학교의 식당 모습이다. 마음을 모아 하나가 되자고 시작한 일이 평생 동지들의 사이를 갈갈이 찢어 놓고 있었다.

 

물개처럼 수영을 잘하는 선배가 까마득 멀리 나가 있어 물에 떠있는 머리가 야구공 크기만 하게 보인다.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 쪽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를 향해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온다. 순식간에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밧줄과 부표를 들고 작은 곶의 바위 끝에서 구조작업을 시작한다. 그 물개가 일촉즉발의 위험에 처한 것을 우리는 전혀 몰랐다. 그토록 예쁘고 평안한 바다에 엄청난 함정이 숨어있다. ‘이안류. 바로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 속의 조화를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자랑하는 힘과 능력이 코앞에서 벌어지는 위험을 이겨내지 못한다. 위대한 하느님의 손길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의 재주인가?

 

시작처럼, 계획과 다르게 마무리하는 교구신학생들의 수련회 프로그램에는 다윗성왕의 말씀이 들어 있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 4)

 

衣以威嚴  衣以威嚴 (의이위엄; “존엄을 차려입으셨다.”, 시편 93, 1), 夷亭 朴詠茂(아오스딩) 作

지중해 평화를 위한 대화와 포용

교황은 대화와 선포를 기반으로 하는 「포용의 신학」이 확산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강한 어조로 밝혔다. 그것은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끼리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진리의 기쁨」(Veritatis gaudium)에 비추어 본 지중해 지역의 신학적 상황'이라는 주제로 이틀간 나폴리에서 열린 회의가 교황의 연설로 마무리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령 「진리의 기쁨」의 정신에 따라 교회가 나아갈 방안에 관해 신학적 연구를 재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지중해가 언제나 환승, 교환, 때로는 갈등의 장소였다고 회상하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꾸준히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되었고, 그 중 일부는 아주 극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포용의 신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신학은 진정하고도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모두를 포용하고 형제애로 가득한 평화적 사회 건설과, 하느님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환경으로 바꾸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대화와 케리그마

교황은 두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하나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를 선포하는 케리그마이다. 다른 하나는 '대화'인데, 대화는 복음화를 핵심으로 하는 교회쇄신연구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대화는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상황에 관련되는 '분별의 방법'이며 선포라고 말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대화하고 선포하는 모습을 보여준 예를 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삶의 방식과 선포의 방법은 정복하려는 정신이 아니고, 개종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고, 공격적으로 반박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람들과, 또 그들의 문화와 대화하는 것이며,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알제리 티브히린의 수사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또 같은 나라 오란의 주교 피에르 클라베리(Pierre Claverie)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슬람교, 유태교와의 대화

이 대화는 신학대학에서 아랍어와 히브리어의 어문학 과목을 장려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유태교와 이슬람교와의 관계를 증진시켜, 뿌리가 같다는 것과 아울러, 서로 다른 점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교황은 우리 사회와 도시의 미래를 밝게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슬람교와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부활절에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비극처럼, 대화가 불가능한 광신적 집단이 저지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대화상대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날 콜롬보에서 온 추기경이 교황에게 한 말을 전한다. "할 일을 다 마치고 났을 때, 그리스도인 그룹이 이슬람교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서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맘을 초대해서 함께 차를 타고 그들에게 갔습니다.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런 짓을 한 극단주의자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켰습니다이것이 바로 친밀감을 보여주면서 대화하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유태인들과도 종교적 차원에서 좋은 관계를 가지고 더 잘 살아야 한다면서, 교황은 자기의 의견을 피력한다. 지중해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사이에 있는 다리와 같은 지역으로, 공동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갈라져 나온 자손들이 함께 살아갈 평화의 큰 천막을 건설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1) ☞ 내일 계속

(1) Vatican News. "Pope in Naples: Dialogue and Welcome for Mediterranean of Peace." Vatican News. Last modified June 21, 2019.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19-06/pope-in-naples-dialogue-and-welcome-for-mediterranean-of-peace.html.

 

 

'카테키시스(Cateches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의 오순절  (0) 2019.06.23
사랑의 불  (0) 2019.06.21
교회 안의 여성  (0) 2019.06.20
공의회와 여성  (0) 2019.06.19
아마존 시노드  (0) 201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