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르노 파파 65

아낌없이 주는 마음

"길고도 긴 여정의 끝을 찾기가 이렇게 어렵고 힘이 듭니다. 세상에 보내 주신 그분의 깊은 배려(섭리)라 믿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우리네 인간사의 잣대로 그 의미를 재려는 생각을 머리 속에만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중략) 오는 8월 15일로 만 90년을 사시게 되는 어머니, 당신 홀로 쓰시던 방에서 고별식(?)을 하고 나서실 때 정말 못 돌아오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 벌써 열흘 전입니다. 이젠 그나마 정붙일 만한 이 병원의 작은 공간마저도 지키지 못할 신세가 되셨습니다. (중략) 차라리 이도 저도, 아무 것도 모르는 의식불명 상태라면 그 양반 입게 될 마음의 상처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건방’지리만큼 똑똑한 정신으로 문병객들에게 인사치레 하는 모습, 글로 더욱 마음이 무겁습니다. (중략..

본조르노 파파 2019.04.14

자비의 금요일

간헐적 단식을 해봤다. 아내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체중을 줄이는 효과가 제법 있는 것 같다. 최근 주변에서 들은 ‘효소단식’에 비하면 그건 장난 수준이었다. 오로지 효소라는 멀건 물만 마신다는 것, 열흘이나 걸린다는 것, 보식의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 아무나 쉽게 엄두 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놀라웠다. 어려운 과정이 가져온 결과를 봤다. 정말로 배고프다는 것이 무엇일까? 아침을 굶었는데 점심을 먹을 희망이 없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이런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봤는가? 꽤 오래전에 들었던 말을 되새겨 본다. 건강을 위해 자의적으로 먹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이것과 섞어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다. 잊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산다. 온통 기억이 전 같지 않다는 푸념들이다. 그런데 잊어버리고 사는 것..

본조르노 파파 2019.04.13

순교자의 교회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모래 위에 앉아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석이는 파도소리는 듣기에 따라 지독한 소음이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수평선은 오늘 따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한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 앞에서 위안을 얻기보다 위압을 느낀다. “바다의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우리는 그저 모래알이다. 내가 인간 능력의 한계라고 여긴 수평선 너머에서 풍랑과 사투를 벌이며 바닷길을 따라 들어오신 땅에 김대건 신부님은 ‘순교의 교회’를 일으키셨다. 신부님의 목선을 깨 버린 바다와 나바위는 금강으로 이어져 있다. 잔잔할 것 같은 그 서해 바다는 170년 전의 거센 파도를 지금도 품고 있다. 오늘은 베네딕토 16세 명예교황님의 교회에 대한 걱정을 전한다. 오늘 우리는 ..

본조르노 파파 2019.04.12

우리가 진 빚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이사가 15년이 되어간다. 짐만 되는 책을 이제는 정리하겠다 싶어 시작한 짓이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에 갈피갈피 훑다가 낡디낡은 추억더미에 흠뻑 빠졌다. 책마다 한두장씩 보이던 상본이 봉투 하나에서 뭉테기로 나왔다. 오래된 사진첩 속에 제대로 자리를 못 잡고, 껍데기 안쪽에 묶여 있는 천덕꾸러기 사진처럼 뒤집어지고 거꾸러진 채 담겨 있었다. 우리는 작은 상본 안에 많은 것을 담았었다. 영명축하, 생일축하를 위해 보내는 영적선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엽서처럼 전하고 싶은 마음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연애편지도 아닌데 빌어 쓴 돈 갚듯 눈앞에서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몰래 책상 설합에 넣는 방법을 많이 썼지만, 성당의 개인 자리 속 기도서를 우체통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내가 몹시 ..

본조르노 파파 2019.04.10

희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희망이 없다”는 말이 낯설지 않다. 얼마나 많이 절망을 맛보았던가? 돌이켜 보면 스릴 넘치는 한 편의 영화가 바로 내 삶이 아니었나 싶다. 아주 작은 이유로 엄청난 결과가 만들어졌고, 눈곱만큼 사소한 인연이 삶 전체를 바꾸는 일을 냈다. 평탄한 신작로 보다는 가시밭길이 많았고, 강냉이 죽에 질린 위장보다는 말로 인해 찢어진 가슴이 더 아팠다. 여름엔 너무 더워 힘들었고, 겨울은 지나치게 추워 괴로웠다. 꽃이 예쁜 봄엔 바람이 심하고, 낭만의 가을은 왠지 모르게 슬프다. 젊어서는 힘들어 어려웠고, 늙으니 무료해서 힘들다. 머리 속은 거짓 창고요, 껍데기는 위장막이다. 세상 안엔 도둑이 득실거리고, 성당 밑엔 마귀가 모여 산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가서 밉고, 미워하는 놈은 배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아서..

본조르노 파파 2019.04.10

소극적 자선활동?

춘천교구의 초대 교구장 구주교님은 은퇴하신 후 우리 본당에 와 계셨다. 주교님은 매일 아침 ‘정례미사’가 끝난 후에 별도로 혼자 미사를 드리셨다. 등교시간에 쫓기는 위험을 감수하고 나는 주교님 미사복사해 드리는 일을 즐겨했다. 주교님께서 매번 50환씩 용돈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 돈은 ‘까먹는’ 데 쓰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께 뺏기고 말았는데 “천주님께서 주신 돈은 다른 곳에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애긍’으로 하느님께 되돌아 갔을 것이라 믿는다. 어려서 성당 마당은 나의 놀이터였다. 집과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을 빼고 하루를 채우는 자리는 거의 성당이었다. 호랑이처럼 엄하셨지만 사제관 옆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음이 시끄럽다고 야단치시는 신부님을 뵌 기억..

본조르노 파파 2019.04.09

평화의 匠人

내가 가장 많이 쓴 글은 편지다. 그 중에 반은 어머니께 보낸 것일 게다. 일찍 그 따뜻한 품을 떠난 아픔이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되어 내 가슴에 묻혔다. 나는 그분의 기도 덕분에 아슬아슬 곡예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옛 교우들이 다 그랬겠지만 특별히 울 엄니 성모님께 대한 공경심이 지극했다. 아침에 세 꿰미, 저녁에 또 그렇게 「묵주신공」을 하셨다. 기본 신공을 다 하고 덤으로 또 하셨다. 여쭤본 적은 없지만 필경 아침 저녁 한 꿰미는 날 위해서 하셨으리라. 둘 사이 38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는 알량하게 나이 들어가면서 나에게만 생긴 것이었나 보다. 머리 크고 나면 다 그렇게 된다던 어른들 말씀이 그런 거였을까?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불만이 야금야금 그 애절한 그리움을 갉..

본조르노 파파 2019.04.07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삼왕내조’, 나는 아직도 이 표현이 더 익숙하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시편72, 10~11) 「주님 공현 대축일」의 화답송을 들을 때마다 생목처럼 올라오는 기억이 있다. 나는 1974년 새해를 서석이라는 오지에서 맞았다. 적어도 그때는 ‘극오지’라 표현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 소읍이었다. 머리맡에 떠놓았던 물이 사발과 완전히 한덩어리가 될 만큼 추웠고 석유를 때는 등잔이 어둠을 밝히는 도구의 전부였다. 삼왕내조축일 미사 후에 황급히 점심식사를 하고 나가신 신부님은 오후 내내 돌아오시지 않았다. 한 마디 말씀도 없는 신부님과 같이 하던 그날의 저녁식사는 한없이..

본조르노 파파 2019.04.07

'성 금요일'의 묵상

내가 만난 두번째 聖人은 황 페리(프란치스코) 신부님이다. 나는 그 신부님으로부터 첫영성체를 받았다. 내 머리에 남아 있는 구약의 이야기 대부분은 10살 되던 해부터 2년간 그분께서 심어 놓으신 것이다. 그 시절 환등기 영상의 그림으로 내 앞에 나타난 ‘소년 다윗’의 모습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내 첫눈에 비친 신부님은 필시 ‘존 웨인’ 이었다. 호주 大목장주의 외아들이 만25세가 되던 날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지질히 가난한 전쟁의 죽음터로 오셨다. 신부님의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영상 편지(당시 16밀리 필름)를 어린 나를 데리고 사제관 바닥에 앉아 보셨다. 나는 그저 영화보듯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 신기했지만, 부모자식 간에 겪으셨을 단장의 슬픔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렇게 잘생기고 건장한 아들을 어찌..

본조르노 파파 2019.04.06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내 기억의 끝은 「성인열품도문」에 닿아 있다. 길고도 긴 「조과」,「만과」는 어린 5남매에게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누나들은 나이 순서대로 졸리거나 싫은 티 내기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리다는 특권과 늦둥이 외아들이라는 특혜 때문에 기도 중에 조는 것에 제약이 덜했다. 그러나 학교도 가기 전, 여섯 살부터 그 영광스러운 복사를 하기 위해 그동안 누렸던 부정한 특혜를 몽땅 반납한 것은 물론이고 「時課」와는 별도로 과외공부를 해야 했다. 영어라고는 ‘a’도 모르시는 어머니로부터 어려운 라틴어 미사통상문을 입전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일종의 기적이다. 나중에 그 ‘층계송’ 앞 문장의 의미를 알고 참 멋진 말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시 쓸 수 없는 기도가 되어버렸다. "Ad D..

본조르노 파파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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