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이사가 15년이 되어간다. 짐만 되는 책을 이제는 정리하겠다 싶어 시작한 짓이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에 갈피갈피 훑다가 낡디낡은 추억더미에 흠뻑 빠졌다. 책마다 한두장씩 보이던 상본이 봉투 하나에서 뭉테기로 나왔다. 오래된 사진첩 속에 제대로 자리를 못 잡고, 껍데기 안쪽에 묶여 있는 천덕꾸러기 사진처럼 뒤집어지고 거꾸러진 채 담겨 있었다.
우리는 작은 상본 안에 많은 것을 담았었다. 영명축하, 생일축하를 위해 보내는 영적선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엽서처럼 전하고 싶은 마음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연애편지도 아닌데 빌어 쓴 돈 갚듯 눈앞에서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몰래 책상 설합에 넣는 방법을 많이 썼지만, 성당의 개인 자리 속 기도서를 우체통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내가 몹시 아팠을 때 침실까지 식판을 가져다준 네가 정말 고마웠어. 잊지 않을게!”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이다. 내가 그런 적이 있나? 그 친구는 나에게 「천주경」을 선물했다. 36년만에 배달된 빨랑까를 받았다. 「성호경」 다음으로 외운 기도가 「천주경」이다. 평생을 바친 기도의 의미를 교황님의 교리교육에서 다시 배운다.
교황님은 ‘죄’가 ‘빚’이라고 가르치신다. 사랑도 용서도 죄다 빚이다. 그러고 보니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 여태껏 살면서 빚진 이들에게 상본 한장씩 보내고 싶다.
교황님의 교리교육 – 오늘 ‘일반알현’에서
‘일반알현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번주 교황의 교리교육(catechesis)은 지난번에 이어 「주님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에 대한 내용이다. 다음은 교황 교리교육의 공식 영어 요약이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구하는 방법(마태 6,12)을 예수님은 어떻게 알려주셨나 살펴봅시다. 매일 밥이 필요한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의 그리스어 원문에서 '죄'라는 단어는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부모, 친구, 그리고 우주만물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유대를 맺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섭리적 현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열심한 사람조차도 주님께 진 빚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교황은 알현자들이 사순절 순례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정화되고 새로운 마음으로 부활을 맞게 되기를 축원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족들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빕니다.”
출처: Vatican News, 10 April 2019, 09:49, 번역 장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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