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300

삶의 흔적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밟듯 도처에 친척이 널려 있는 걸 몰랐다. 언필칭 구교우 집안은 ‘모퉁이의 머릿돌’(사도 4, 11)을 골라 잘 다듬어 두었다가 일찌감치 하느님께 바치는 가문의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1년을 넘게 살면서도 아래 윗반을 합해 열명도 더 되는 핏줄들끼리 서로 모르고 살았다. 방학을 끝내고 돌아온 같은 반 친구가 느닷없이 사죄를 구한다. 아재를 몰라보고 싸웠던 패륜에 대해 아버지께서 내리신 보속을 받고 온 것이다. 친구이자 동창생인 조카신부님의 전화를 받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제의 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자성과, 은퇴를 앞두고서야 깨닫는 아쉬움이 귀에 매달린 수신기 밖으로 철철 흘러 넘친다. 가슴이 먹먹한 걸 내색하지 않았다. 배우고..

교황님의 묵상 2019.09.05

복음의 언어는 사랑

교황님의 북한방문이 곧 이루어질 듯이 온 나라가 들끓었었다. 채 1년이 못된 작년 10월의 일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아이들 장난처럼 쉽게 눈앞에 펼쳐지는 줄 알았고, 북녘의 동포들에게 ‘기쁜소식’이 홍수처럼 밀려들 꿈이 실현된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냄비 속 물처럼 우르르 끓다가 식어버리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가느다란 희망의 실오라기는 결국 붙어있는 가닥을 거의 잃어간다. 지난 5월 불가리아와 북마케도니아를 순방하고 귀국하는 기내에서 당신의 힘과 열정의 원천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답하신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관광을 한다면 피곤하겠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괜찮다며 세계를 누비시는 노익장이 정말 놀랍다. 그분께 맡겨진 목장이 인간의 행성, 지구이고, 그 세상 곳곳에 노인이 돌보..

교황님의 묵상 2019.09.05

순교자성월에

“기우는 정의의 목숨을 건지려 주림과 추위와 죽음과 싸우며...”(가톨릭성가 283번 2절) 순교자들의 고통이 가슴을 저미는 아침이다. 최연소 순교자인 베드로 유대철 성인은 “기우는 정의”를 생각하셨을까? 14세의 소년이 그토록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견뎌낸 힘은 무엇일까? 꺽이는 관절, 으스러지는 뼈, 손톱 밑을 찌르는 육체적 고통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그에 못지않은 어려움은 “예”와 “아니오”의 결단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고통과 安慰의 갈림이고, 명예와 치욕의 경계이며, 죽음과 삶을 가르는 간극이었다. 오늘 나에게 결단을 요구해 오는 것은 무엇일까? 정의와 공정, 진실과 거짓, 평화와 갈등, 믿음과 불신… 깊게 생각하고 따져 볼만한 능력을 벗어나는 가치와 의미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만이라..

교황님의 묵상 2019.09.01

교회는 '동네병원'

미어터지는 병원에서 예약시간이란 것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만큼 기다린 끝에 주치의를 만나고 나오면서, 별 이상이 없는 덕에 진료가 짧아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길었던 불편을 깨끗하게 잊는다. 수납과 처방전 발급은 잘 세팅된 스마트기기 덕분에 쉽게 처리됐지만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승강기 앞에서 멈췄던 땀이 다시 맺힌다. 30년이나 이어온 병원의 정기진료를 빼고는 부부간에 친하게 지내는 전문의를 찾아 건강을 맡긴 것이 제법 됐다. 단지 아픈 것을 치료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터놓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치유라는 진실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이런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편해서 좋고 즐겁기까지 하다. 환자들의 혜택을 넓히기 위한다며 바뀌는 의료제도가 소규모 의원의 운영을 어..

교황님의 묵상 2019.08.30

중국, 새 주교 서품

로마 시간으로 어제 중국에 새 주교님이 나셨다. 교황님의 임명권에 따라 주교님이 탄생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교황님께서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공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작년 9월 교황청과 중국정부 간에 체결된 주교임명에 관한 합의는 아직도 ‘잠정’(provisional)이란 딱지가 붙어 있다. 합의문이 서명될 당시 보도된 「바티칸 뉴스」의 기사를 인용한다. “점진적인 상호접근의 결실인 이 잠정 합의문은 오랜 숙고를 거친 협상 끝에 이뤄졌으며, 그 실천에 대해 정기적으로 평가를 시행할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번 합의는 교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안인 주교 임명을 다루고 있으며, 양측의 광범위한 협력을 위한 조건들이 붙었다. 이번 합의로 풍요로운 결실과 장기적 전망의 제도적 대화의 과정을 촉진하..

교황님의 묵상 2019.08.29

마더 테레사

아무리 막고 지켜도 구멍은 뚫린다. 철벽같은 규율의 장막에 덮인 소신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방송청취와 신문구독이 엄격히 금지된 폐쇄사회에서 우리는 킹스컵과 메르데카배 축구경기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다. 난방을 위해 설치된 스팀 파이프에 묶인 구리선이 깊숙한 그곳을 지나는 전파를 잡아 이석라디오로 재생시켜주는 고도의(?) 기술을 발휘한 손재주 좋은 친구 덕분이었다. 물론 중계를 듣는 사람은 엉성한 전파수신기의 주인이고, 상자 안에 나란히 누워있는 크레용처럼 4열 횡대로 오와 열을 맞춘 소대 규모의 침대 속에서 우리는 손수건 돌리듯 귓전으로 이어 주는 속삭임으로 주요 상황을 전달받고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축구중계를 듣는 규칙위반이 걱정되어 졸아든 가슴에 손을 얹고 잠에 빠진다. 촌놈의 꿈은 조금 전..

교황님의 묵상 2019.08.28

사랑의 '좁은 문'

‘이율배반’이 세상을 덮는다. 정의로운 척 한 말이 자신을 옭아매고, 공정한 척 한 짓이 자기의 삶을 휘감아 버린다. 일이 그르쳐지면 당장 머리를 돌려 탓할 사람을 찾는다. 내 잘못, 내 탓, 내 허물은 휙 돌아간 머리의 회전에 쥐여짜져 목 밑에 내려와 잠시 숨는다. ‘내 눈의 들보와 네 눈의 티끌’(마태 7, 3-4)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시선이 오늘 우리 사회를 향하고 있다. 지구의 자전속도가 회전목마 같다는 것을 못 느끼고 있었다. 돌고도는 세상을 덮고 있는 이물질이 하도 더러워, 진실과 정의, 공정과 평화가 붙어있을 자리를 잃고 원심력에 의해 우주 공간으로 날아간 것인가? 돌이켜 보고 나서야 시간의 흐름이 무척 빠르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세상 속 극히 편협한 땅덩이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미물..

교황님의 묵상 2019.08.26

친교와 연대

달이 기운 밤이면 칠흑의 어둠이 천막을 친다. 따갑게 내리쬐던 태양이 하늘과 삼각경계를 그은 봉우리 뒤로 얼굴을 숨기면 하늘 밑 첫 동네 촌락의 공기는 서둘러 식어버린다. 제법 폭이 넓은 내가 작은 마을과 산자락 사이를 가르며 흐르고 있다. 막대에 꽂은 솜방망이가 잔뜩 머금은 기름을 태워 야트막한 내바닥에서 잠자는 물고기를 비춘다. 꿈에서 깬, 놀란 작은 민물고기들이 손가락 사이에 끼여 올라오기도 하고 움켜쥔 손바닥 사이에 잡혀서 물 밖 세상으로 나오기도 한다. 동상 걸린 듯 감각을 잃게 한 발의 냉기가 허벅지를 지나 가슴까지 올라온다. 입술이 새파래진 시골 아이들의 눈에 눈곱처럼 졸음이 끼면 불덩이가 하나씩 사라지고 열대야란 단어조차 모르는 산속 동네의 한 여름 밤 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들이 하나씩 눈..

교황님의 묵상 2019.08.22

病院船

세상이 어지럽다. 왜구와 빨갱이가 서로 삿대질을 해대고, 좌와 우가 진영을 나누어 대치한다. 심지어 교회도 시비를 가리자고 길거리와 사이버 세상에서 입에 거품을 문다. 이념분쟁이 되살아나고 정치, 외교, 경제에 대한 지탄과 해명이 넘쳐난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민초들의 삶만 고달프다. 나랏일, 세상일 걱정할 주제도 못되니 그저 배곯지 않고 살기를 바라지만 이 소리, 저 주장 듣고 머리가 복잡하다. 내일의 걱정이 쌓여간다. 오늘의 복음이 가슴을 후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 51) 강론의 복음해설을 어제 본 시사토론이 덮어 버린다. 머리를 흔들어 분심을 털어내며 흘려버린 강론을 보충한다. “그리스도의 메시..

교황님의 묵상 2019.08.18

하늘의 문

하느님의 은총이 성모승천 대축일에 장맛비 되어 내렸습니다. 찌는듯한 더위가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며 사라지는 이치가 신기합니다. 쌓였던 눈이 녹는 것에 날을 정하는 경우는 없지만 더위를 물리치는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은 천주학쟁이들 간에 오래전부터 회자되어 왔습니다.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오르심"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므로 자신의 능력으로 승천하였으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 부르심을 받았기에 비로소 승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모의 승천은 '부르심을 받은' 승천이란 의미를 지닌 '몽소'(蒙召) 승천이라 부름으로써 이를 예수 승천과 구별한다."(가톨릭 대사전) 세례명 '아숨타'의 축일이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입니다. 교황님께서 성모 승천 대축일에 바치신 삼종..

교황님의 묵상 2019.08.1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