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300

첫 순교자

故事成語가 고생하고 있다. 국적이 분명하지 않고, 품격도 부족한 ‘新造成語’가 거리낌없이 전파를 탄다. 여하튼 ‘네 탓 공방’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허리춤엔 거짓과 파렴치가 가득 담겼다. 예수님의 질책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각자가 정해 놓은 기준을 들이대며 공정과 정의를 외친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 3) 엄청나게 많은 정보 속에서, 너무 다양한 주장을 듣는 머리가 혼미하다. 겹치고 쌓이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흐려진다. 선과 악이 들러붙어 뒹굴고, 적군과 아군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하고, 천사와 마귀에 관한 이단적 궤변이 가난과 고통으로 졸아든 가슴을 뚫는다. 이쯤에서 주..

교황님의 묵상 2019.09.26

파괴된 삶의 재건

11월 말, 찌는듯 더운 브리즈번에 차려진 회의장소는 주립대학교 캠퍼스 안이다. 회의실과 식당은 물론 성당과 기숙사가 한곳에 모여 있어 닷새 간의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이다. 6대주 중에서 아프리카를 제외한 전 세계의 대륙에서 120여명의 국가대표들이 모였다. 같은 뜻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도직운동의 실적과 현황을 보고하고, 가야할 길을 협의하는 자리다. 전례와 회의는 모두 영어와 스페인어, 두 말로 진행되기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자료의 부피가 크다. 캐나다에 처음 갔을 때 입국서류부터 모든 안내판과 자료가 영불 이중어로 되어 있는 것이 신기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주교좌 대성당에서 봉헌된 개막미사는 잔치 같았고, 길고도 긴 아침 성무일도와 매일 미사가 주는 감동은 색다르다. 눈과 말이 각기..

교황님의 묵상 2019.09.25

대화의 기술

영어에 ‘백색 거짓말’(white lie)이라는 표현이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선의의 거짓말’은 존재했었나 보다. 이를 활용한 의학용어 ‘플라세보 효과’는 심리적 치유를 위하여 환자에게 가짜 약제를 처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 ‘플라체오‘(placeo)로 “마음에 들다”, “즐겁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견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필요악처럼 보인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경축 이동’하여 드리는 주일미사 강론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순교였다. ‘백색 순교’라는 뻔한 답을 예상하고 있던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은 뜻밖의 말씀이었다. “오늘날의 순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공감한다. 진실 보다는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

교황님의 묵상 2019.09.24

친밀한 관계

우리 주교님은 ‘向主四德’을 갖추신 분이었다. 信望愛 삼덕 외에 변덕(變德)을 하나 더 가지신 주교님께 우리가 붙여드린 존경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방학을 하면 교구 신학생 전원이 모여 교구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관례였다. 서울교구와 달리 넓은 지역으로부터 모여왔기에 교구청에 들렀다 집에 가는 길은 하루 이상 방학을 깎아 먹었다. 고작 1주일 뿐인 자유시간을 뺐기는 것이니 아깝기 그지없다. 마치 인사명령지를 받듯 방학 동안 선교파견의 소임지가 어디인지 알고 가야하는 마음은, 가족들과의 짧은 만남을 기다리며 조바심에 시달린다. 주교님은 출타 중이었다. 열댓 명 교구신학생들의 '데까누스'㈜는 부제님이었다. 줄줄이 시종직, 독서직을 받은 선배들 밑으로 새카만 쫄병들이 한배 강아지 형제들처럼 졸졸 따라붙..

교황님의 묵상 2019.09.21

용기와 분별력

성당에 오는 새벽길이 제법 많이 어두워졌지만, 성당 안은 유난히 밝은 느낌을 준다. 모처럼 불이 밝혀진, 감실 밑 김대건 성인 유해함으로 눈길이 간다. ‘유해친구예식’은 쉽게 만나기 어려운 전례이기에 순교자 성월의 중간에 참례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가 특별하다. 모든 본당이 오늘 ‘축일미사’를 지내지는 않다. 신자들에게 참례의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에 따라, 주일로 옮겨 축일을 지내는 본당이 많은 것이 그 이유이다. 신부님은 ‘이동 축일’이라는 안내를 하셨지만, 엄밀히 이 용어의 의미는 이렇다. “날짜가 바뀌지 않는 '고정 축일'과 비교하여, 특정 주일이나 요일에 거행하도록 정해져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일, 예를 들어 부활 대축일, 성체 성혈 대축..

교황님의 묵상 2019.09.20

동정심의 미덕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은, 가을을 맞은 공원 뒷동산을 산책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끔찍한 더위가 어떻게 이렇게 식을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고, 하늘과 구름이 어울려 그려내는 그림이 어찌 이리 고운지 놀랍기만 하다. 머지않아 땅에 묻힐 나뭇잎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양지를 찾아 느긋이 낮잠을 즐기는 어린 고양이가 지가 먼저 갈 세상을 엿보게 이끌어 준다. 정수리를 찌르던 뙤약볕은 아비규환의 느낌을 칠한 어수선한 옷을 입고 광란의 춤을 추었지만, 말랐던 콧속을 자극해 어디선가 물을 끌어오는, 살랑이는 가을바람은 훌쩍대는 불편함마저 쉬이 삼켜버린다. 둘째의 출산을 철저히 대비했다고 믿었건만, 막상 닥치고 보니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당황한 머리가 절제를 못하고 허둥대는데, 참으로 한심하고 놀랄 일이 겹친다..

교황님의 묵상 2019.09.18

동방 가톨릭교회

지난 5월 초 ‘그리스 가톨릭교회(Greek-Catholic Church)의 지도자 초청’에 관한 교황님의 기사를 골라 단신으로 올린 적이 있었다. 그날 SNS 상에서 동창신부님들과 ‘동방교회’에 관한 명칭과 전례, 교황의 수위권 등에 관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찌 깊이 있고 무거운 학문적 논의를 기대하랴? 단지, 교회의 역사와 갈라진 형제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교회일치’라는 하느님 백성이 공동으로 짊어진 숙제의 첫 칸을 메우는 노력이 될 것이라 믿고 싶다. Vatican News를 통해 교황님이 갖고 계신 또다른 관심사는 ‘갈라진 형제’들에 관한 것임을 어렴풋이 보아왔다. 뼛속까지 천주학쟁이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 이상한 금기를 품고 살았다. 내가 예배당 안에 처음 들어가 본 것은 ..

교황님의 묵상 2019.09.15

사도들의 선교파견

사업차 도쿄에 갔다가 현지에 파견된 신부님을 찾았다. 귀국을 늦추고 그 분의 손에 끌려 순례를 따라 나선 것은 예정에 없던 것이다. 도쿄에서 바닷길로 170Km쯤 떨어진 작은 섬, 고즈시마(神津島)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20년도 더 지난 그 시절, ‘오다 쥬리아’란 선조의 신앙을 본받기 위한 순례가 꽤 인기를 끌고 있었다. ‘율리안나’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세례를 받은 조선의 여인으로, 후일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된다. 혹독한 박해 중에도 고귀한 신앙을 지키다가 이 작은 섬으로 유배된 그녀는, 순교자도 성인도 아니지만, 작은 섬의 주민들이 수호성인으로 받들며 공경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학문적 고증은 ‘오다 쥬리아’의 인생여정이 그 섬사람들이 믿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교황님의 묵상 2019.09.14

복음화란?

마음을 졸이던 끝에 간신히 비행기를 탔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작은 공항이 세계최다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방콕의 그곳을 방불케 한다. 우리 한가위와 비슷한 명절을 고향에 내려와 쇠고, 뉴욕의 직장으로 돌아가려는 인파가 새벽잠을 깨고 모여든 것이다. 그들의 명절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그 이름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음식을 장만해 차례를 지내는 우리 추석의 관습에는 조상께 대한 추모와 그분들을 통해 복을 구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일용할 양식인 오곡백과,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주는 청명한 날씨, 가족들의 화목을 이끌어 주는 은총이 우리 땅에도 수북이 쌓였다. 이 행복을 주시는 분께 드리는 감사를 끼워 넣고 싶은 한가위의 큰 달이 출연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가 살기..

교황님의 묵상 2019.09.11

작은 사랑의 실천

새벽 노을이 예쁘다.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하늘을 뒤덮은 구름사이로 태양의 기운이 흩어진 모습을 드러낸다. 저 너머의 밝고 맑은 세상의 얼굴을 슬쩍 보여주려는 고마운 마음이 보인다. 사물을 본 의미를 잃어버린다. 시간이나, 글자, 무엇인가 보기는 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눈이 받아들인 정보와 뇌의 분석 결과가 따로 논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것이라는 말씀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친다. “흙으로 된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른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교황님의 묵상 201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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