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17

긍정적 징후

탐험대를 조직했다. 벌써 몇차례 ‘작전회의’가 있었다. 제법 많은 준비물을 조달하는 것이 우리 형편 상 녹록하지 않다. 후방 마무리 책임자는 만장일치로 진즉 선발되었지만, 척후 임무를 맡은 선봉대장을 뽑는 데에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탐험 마지막의 시간 관리가 중요하여 체력과 순간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소하고 부실한 체력 탓에 대열의 제일 중간 자리를 배정받았다. 몇개 받아 둔 날 중에서 D-day를 정했지만 H-hour를 잡는 것에는 신중을 기했다. 탐험에 소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추정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행의 날이 왔고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작전을 개시했다. 공식적인 시작기도 없이 침묵 중에 각자 하자는 약속도 미리 해 두었다. 작전에 방해되는 기도 소음조차도 사전에 차단하겠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아내가 챙겨준 옷을 싸 들고 일찍 집을 나선다.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아껴 운동까지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짜서 만든 습관이다. 오늘은 혼자 대충 챙겨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사람은 남편을 버릴 기세다. 긴 세월 엄청나게 큰 부담을 준 어머니의 사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완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애를 출산하고 한달 반 만에 시작된, 혹독한 간병이 3년 이상을 끌었다. 이제 두 아이도 어느정도 키웠는데 또 다른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내가 왜 모를까? 그것만 아니라면 수천 번이라도 양보하고 싶다. 두번째 비닐하우스 성전을 지었다. 처음 지은 자리에 성전건축을 시작하려고 새 터로 이사한 것이다. 시멘트를 채운 사각 깡통을 다리 삼아 널빤지를 얹은 의자나, 바람 숭숭, 덥고 춥고, 조..

하느님, 저의 희망

안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맛있는 물을 먹고 자랐는지 안 것은 집을 떠난 다음이다. 우리집 닭은 참 고은 노래를 불렀다. 여명 알리미, 닭우는 소리에 대한 환상은 얼마전 동남아 여행 중에 깨졌다. 아침마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달걀을 상납받았으니 우리 닭만 예뻣는지도 모른다. 사랑도 고마움도 다 제 잇속 차림이다. 어머니는 구정물 처리를 위해 돼지도 한 마리 키웠다. 냄새는 좀 났지만 덩치가 산 만한 녀석은 성당너머 우리 밭에 뿌릴 거름을 부족하지 않게 생산했다. 단차가 있는 뒤뜰의 윗단에는 작은 소대 규모의 장독대가 한결같이 점호를 준비한다. 단층 둘레의 장식은 채송화와 봉숭아의 몫이다. 나팔꽃과 맨드라미, 호박꽃이 주인이었지만 양귀비꽃도 손님으로 함께 살았다. 성당에서 흘러내린 비탈의 경계에..

기도의 밑그림

마침내 파란만장했던 공사가 마무리되어 새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을 맛봤다. 계속해서 행사가 이어진다. 입당음악회를 끝내고 겨우 한숨 돌린 것 같은데 벌써 5월에 들어서 있었다. 이른바 ‘IMF 금융위기’로 인해 시공사와 타절한 후유증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제법 많이 남겼다.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성전봉헌식 준비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웠지만 축성이 끝나면 떠나실 신부님을 위해서라도 잡힌 행사를 소화해야 한다. 어버이 날을 맞아 원로사제를 찾아 뵙기로 한 계획이 그 중에 끼어 있다. 와락 기대가 덮친 것은 말이 나온 첫날이고 시간이 갈수록 자꾸 망설여진다. 25년이 족히 지났다. 그 어른은 어떤 모습이 되어 계실까? 대신학교 본고사를 보기 위해 모처럼의 긴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홀가분한 기분..

하느님의 사랑

예전부터 매미우는 소리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저도 슬퍼서 우는 것이라 생각하니 연민마저 일었는데, 알고 보니 구애의 방편이라 한다. 싫은 표현을 대놓고 할 걸 그랬다. 사랑을 구하는 노래라는 것이 땡볕에 물을 들어붓는다. 사우나독 안에서 바짝 달궈진 돌에 종지 물 떠 붓는 것과 흡사하다. 옥수수 밭이 주는 답답함을 모르면서 시골의 여름을 논하기는 어렵다. 조밀함에 습기가 더해지면 숨막히는 화생방훈련의 '가상현실체험'이 된다. 감자 밭 고랑에 뒹구는 돌멩이가 태양의 열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자칫 터질 것 같아 옆에 가기가 겁난다. 자갈투성이의 좁은 신작로는 하루 한 번 지나가는 달구지 같은 버스에게 깡마른 몸을 억지로 내준다. 염치없는 막걸리 차가 불쌍한 이놈의 등때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밟아 재낀다..

사랑의 약점

‘펀치볼’, 매우 낯선 지명이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고, 삼엄한 경계 속에 갇힌 곳, 분단의 냄새가 짙게 나는 남쪽 땅 최북단에 있는 군사시설이었다. 미군 종군기자가 자기 나라의 화채그릇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여준 ‘해안분지’라는 것을 몰랐다. 그 펀치볼에서 남쪽으로 사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짐을 풀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인제군 서화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펀치볼까지 가기가, 그것이 속한 양구군의 주읍 보다 훨씬 가까웠다. 사상 최고의 혹서라고 떠는 호들갑은, 숫자를 보고 부리는 엄살이지 싶다. 제법 북쪽이지만 그곳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다. 공소 대문을 나서던 발걸음이 유격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포병 대열의 허리춤 앞에서 막혔다. 그 많은 장병 중 가장 많이..

在天吾父

해외여행으로 치면 호랑이가 금단현상에 시달릴 정도쯤 되는 시절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에 도착한 것은 이경이 가까워서였다. 몬테 피올로(Montefiolo), 올리브나무로 둘러싸인 이 작은 산은, 고색이 철철 넘치는 수녀원 건물을 털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2월말 밤공기가 못 견딜 만큼은 아니라 다행이다. 시간은 벌써 삼경의 문턱에 닿아 있었지만, 산골 마을 카페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그곳 사람들이 담근 맥주를 마셨다. 그 짜릿한 맛은, 아쉽게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별무리의 기억에 묻혀버렸다. 오늘 새벽미사에서 부른 성가가 자꾸 입 속을 맴돈다. 선율은 단순하지만, 가사는 평범하지 않다. “무변해상 별이시요… 보이소서, 성마리아… 영원무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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