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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신비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지나가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기가 아까울 것 같다. 재스퍼에서 밴프로 내려오는 93번 도로의 이름이다. 만약 어렵다면 천국에 바로 가기 위해 기를 써야할 거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감동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그 길을 가기 위해 재스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곳의 아담한 성당 안이다. 앞줄에 앉은 아이들이 지루해서 몸살이 났다. 사내아이 사형제가 한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으니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세 살이 못돼 보이는 막내는 쉬지 않고 엄마 품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일곱살은 되었을 큰 녀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감금되어 있다. 무려 여덟 명이다. 한가족이 한 줄을 그득 채웠다. 눈치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어쩐지 생소하다.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수줍..

세리의 기도

Cor dulce, cor amabile! 사랑하올 예수성심이여! 성모님의 달 5월이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어졌다. 사랑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계절을 연이어 산다. 봄의 몸통이 여름에게 자리를 내준 것은 예수성심의 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생각이 엿보인다. 당신의 백성이 늘어난 것 뿐만 아니라, 자꾸만 커져가는 사랑의 갈구에 맞추어 예수님의 성심이 점점 뜨거워진다. 육십 중반의 노인들이 주책이다. 사진만 찍으려면 애들 짓을 한다.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모아 심장을 만들더니, 요즘엔 양손을 벌려 손가락 끝으로 두개를 만든다. 감수성이 뛰어나다. 어려서 안방에 걸린 큼지막한 예수성심 상본을 보며 자란 내 몸에는 결코 배지 않는 손짓이다. 그 주책도 6월에 들어서니 의미가 살아난다. 예수님의 성심은 “..

공감과 연대

붉은 제의를 볼 때면 심장을 흔드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이 유별난 감정에 예외없이 붙어 다니는 운률은 복자찬가(福者讚歌)다.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 대신학교의 새내기 우리반은 이 성가와 함께 끓는 피를 몸으로 토했다. 신학교의 역사에 새 장을 연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탄압하기 위해 위수령이 선포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소신학교는 방송청취나 신문구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그날 아침에 본 것은, 우리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문리대 운동장에 주둔해 있던 장갑차의 대열이었다.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국가의 운명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표현과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 땅에 ..

필요한 것을 구하라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어에 눈뜬지 1년밖에 안된 햇병아리에겐 엄청나게 무거운 짐이다. 신학교의 1년 짬밥은 대단하면서도 별거 아니었다. 요령이 통하는 틈새가 극히 좁았지만, 그런 걸 찾았다 해도 혼자만 누리라고 감싸줄 덮개가 빤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힘들게 느껴지는 두번째 해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의 작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큰 바위가, 갑자기 날아든 뉴스로 뒤엎어졌다. 서울교구장에 새 주교님이 임명되었고 그분은 우리학교 교정을 착좌식장으로 정하신 것이다. 주교님은 착좌 미사가 봉헌된 후 일주일 간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당신 신학교생활의 경험담을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셨다. 그분은 그후 꼭 1년만에 같은 자리에서 추기경 서임 미사를 집전하신다. 학교에..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함께 열정을 쏟아 참여했던 운동을 되돌아봅니다. 좋은 날이 많았지만 희뿌연 연기 속에서 더듬고 헤매던 기억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서 웃은 시간이 대부분인 것 같아도, 얼굴 벌개져 날카로운 화살촉에 쓴 말을 담아 쏜 순간이, 꽃꽂이 속 강아지풀처럼 눈에 띕니다. 기쁨, 행복, 우정, 사랑, 이런 것들은 빨랑까 봉지에 담고, 눈물, 걱정, 미움, 분노, 그런 것들은 후회의 통에 넣었습니다. 그 마음과 노력이 모여 있는 방에 ‘봉사’라는 문패가 달렸습니다. 가운데 놓인 묶음은 하늘색 봉투에 들어 있고, 구석쟁이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보자기의 거무튀튀 색깔은 이름짓기가 어렵습니다. 예쁜 방을 만들어 분홍 바구니만 넣을 걸 그랬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야 어울릴 겁니다. 우리가 ..

아들의 기도

신부님은 면도기를 들이대는 내게 턱을 내맡기셨다. 두번째 입원이다. 한번 꺾인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 취임하시던 날 성체조배를 마치고, 환영인사를 위해 성당에 와있던 신자들에게 던지신 제일성이, 120년을 사시겠다는 호언장담이었다. 열심히 생식을 하고 부지런히 걸으신 분이 병원에 누워 계신다. 비서신부님과 점심을 같이했다. 내일 있을 사제인사의 내용을 알아보겠다는 심사다. 못할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새로 오실 신부님께 인사드릴 사람이 없어 대비가 필요했다. 본당이 일주일 넘게 비기 때문이다. 소설 하나를 쓸 만큼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성전건축을 마무리하신 신부님의 새임지가 내일 정해진다. 그 내일은 내가 기획한 성지순례의 첫 날이다. 이 순례는 떠나실 신부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장단이 ..

나를 찾고 계신다

그저 시오리 정도되는 길이 참 멀기도 했다. 작은 냇물을 건너던 생각이 나지만, 길에 배겨 있는 돌의 크기가 매우 다양했다는 기억이 더 또렷하다. 한번 가보고 싶다며 되뇌이는 말은, 거기를 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야 했던 바닷가 마을을 돌아서는 순간, 안개 같이 흩어져버린다. 해발 삼백 미터가 채 안되는 운봉산 서쪽자락의 작은 마을은 구교우들이 모여 사는 옹기골이었다. 안방과 부엌을 가르는 토벽의 정 중앙에 편지지 한 장 크기의 구멍이 파여 있다. 그 턱에 올려진 작은 호롱이 비리비리 맥없는 불꽃 하나를 밀어 올려, 이쪽 저쪽의 어둠을 간신히 내몬다. 옹기가마의 열기가 식은 지 오래된 이곳 사람들의 삶은, 척박한 밭농사가 대부분이다. 복령 캐러 갔다가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

내가 곧 간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 안의 공기가 거짓말처럼 마음을 숙연하게 가라 앉힌다. 오후 다섯 시가 살짝 못됐는데, 성체조배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성체불이 되레 어두움의 농도를 짙게 하여, 감실을 바라보는 눈꺼풀을 닫아준다. 숙연이 경건으로 바뀌는 미세한 변화를 느끼며 신비의 영역에 진입한다. 검은 망막에 독경대와 해설대가 찍힌다. 거기에 한 젊은이가 서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봉사인가, 연기인가? 기도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제대 위아래를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관리인을 향해, 합주단 지휘하듯 손놀림을 연발하는 중년 남자는, 이 본당 사목회 총무이지 싶다. 나이 지긋한 총감독이 성당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다가 점잖게 총무를 부른다. 내기를 해도 이긴다. 그는 총회장이다. 성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

긍정적 징후

탐험대를 조직했다. 벌써 몇차례 ‘작전회의’가 있었다. 제법 많은 준비물을 조달하는 것이 우리 형편 상 녹록하지 않다. 후방 마무리 책임자는 만장일치로 진즉 선발되었지만, 척후 임무를 맡은 선봉대장을 뽑는 데에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탐험 마지막의 시간 관리가 중요하여 체력과 순간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소하고 부실한 체력 탓에 대열의 제일 중간 자리를 배정받았다. 몇개 받아 둔 날 중에서 D-day를 정했지만 H-hour를 잡는 것에는 신중을 기했다. 탐험에 소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추정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행의 날이 왔고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작전을 개시했다. 공식적인 시작기도 없이 침묵 중에 각자 하자는 약속도 미리 해 두었다. 작전에 방해되는 기도 소음조차도 사전에 차단하겠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아내가 챙겨준 옷을 싸 들고 일찍 집을 나선다.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아껴 운동까지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짜서 만든 습관이다. 오늘은 혼자 대충 챙겨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사람은 남편을 버릴 기세다. 긴 세월 엄청나게 큰 부담을 준 어머니의 사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완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애를 출산하고 한달 반 만에 시작된, 혹독한 간병이 3년 이상을 끌었다. 이제 두 아이도 어느정도 키웠는데 또 다른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내가 왜 모를까? 그것만 아니라면 수천 번이라도 양보하고 싶다. 두번째 비닐하우스 성전을 지었다. 처음 지은 자리에 성전건축을 시작하려고 새 터로 이사한 것이다. 시멘트를 채운 사각 깡통을 다리 삼아 널빤지를 얹은 의자나, 바람 숭숭, 덥고 춥고,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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