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안식”
사순시기 피정을 지도하는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인 로베르토 파솔리니 신부는 ‘영원한 안식’이라는 제목의 아홉 번째 묵상을 인도했다. 교황청의 관료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이번 영신 수련의 주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다.
[아홉 번째 묵상]
영원한 생명은 이미 주어진 선물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인 ‘안식’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바쳐온 귀에 익은 기도입니다.
‘영원한 안식’이란 어휘는 마치 끝없는 수면 상태로 삶이 끝나는 것처럼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을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이 내포하고 있는 안식은 충만함과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무덤에 안치되셨을 때 하느님 친히 안식을 체험하셨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누워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성 토요일의 성무일도, 독서기도는 옛 강론을 인용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행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육신 안에서 돌아가시고 지옥은 잠 깼습니다. 주님은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듯 우리 원조를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던 이들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하와의 아들이 되신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고통과 감옥에서 해방시키시고자 찾아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휴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고성소’㈜에 내리시어 그곳에 갇혀있는 이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멈춤이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광란적이고 무익한 활동을 쫓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역자 주] 성 토요일의 성무일도 독서기도, ‘성 토요일에 관한 옛 강론’에 나오는 용어로 역자가 로베르토 파솔리니 신부님의 묵상 내용을 해석하여 이 용어를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 고성소 (古聖所): 경계(境界)라는 뜻의 라틴어 'limbus'에서 유래하였다. 라틴 신학에 의하면, 이미 죽은 이들이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완전히 들지는 못했지만, 벌을 받고 있지는 않은 상태에서 머무르는 곳을 지칭한다. 구약의 조상들이 그리스도가 강생하여 세상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는 곳([라] limbus patrum [영] limbo of Fathers)과 영세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幼兒)의 경우와 같이 원죄 상태로 죽었으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영원히 머무르는 곳([라] limbus infantium [영] limbo of infants) 등 두 가지 뜻이 있다. 후자의 경우 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영세를 통해 얻은 은총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는 성경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지복을 받을 수는 없지만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자연적 상태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출처: 가톨릭사전)
오늘날 사람들은 안식을 그다지 의미 없는 사치로 여깁니다. 우리는 항상 활동적이고,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고, 언제나 생산적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기회에 노출될수록 진정한 안식을 누릴 기회는 줄어듭니다. 일한 뒤에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부름을 받아 맡은 일을 해냈다고 받아들이는 하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결과에 집착하며 사는 한, 우리는 절대로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마침내 평화롭게 멈출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이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적으로 평온한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그분의 안식처에 들어가는 이도 자기가 하던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히브 4, 10)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원한 삶을 위한 훈련과 두려움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내적 평화를 말합니다. 그것은 결과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떨쳐내고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 18)
영원한 생명은 먼 훗날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익어가는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출처: Vatican News, 13 March 2025, 18:00,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vatican-city/news/2025-03/spiritual-exercises-of-the-curia-eternal-re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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