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하지 않게 내리는 비가 대지를 적신다. 읽고 또 읽으며 기도하듯 한 문장씩 옮긴 글이 마음을 적신다. 손을 놓고 멍하니 앉아 볼을 타고 턱밑까지 흘러내리는 액체를 받아낸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어머니를 기린다. 요란하고 질척대는 것보다, 조용하고 가슴 저미는 고요가 좋다. 회상의 성모성월을 보내고 있다.
오는 18일(월요일)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백 번째 생신이다. 그분의 삶은, 엮어낸 슬픈 이야기보다 더 슬프다. 아버지와 하느님, 어머니와 성모님이 그분의 생애를 통해 겹쳐졌다. 형의 희생은 예수님처럼 그분의 기억에 남아 그를 이끌었다.
애달픈 글 앞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교황님께서 당신 어머니께 바친 짧은 시를 어머니를 생각하며 옮겼다. 그분의 마음도 그랬으리라 믿으며...
성인과 그분의 가족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성모님께 봉헌한 삶,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희생정신과 이웃에 대한 헌신과 봉사. 자신의 가정 안에서 물려받아 성장하면서 형성된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ła)의 이 같은 신앙적 특성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특유한 방식으로 발전되어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면에서 ‘가정적인 교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6년 전 4월 27일에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ła)와 안젤로 론칼리(Angelo Roncalli)(주)를 시성하는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이 말은, 폴란드 출신 교황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이야기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들의 부모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성인이 시성되신 이유에 관한 내용들이 지난주 폴란드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에밀리아와 성인에게 이름을 물려준 아버지 카롤의 생애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읽기만 해도, 부모님의 증거자적 삶이 장래 교황의 인격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인이 걸어간 성직의 길은 폴란드 남쪽 끝 작은 도읍인 바도비체에서부터 닦아진 것이었다. 성인의 가정은 그의 사목자로서의 생애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었다. 1920년 5월 18일 바도비체에서 태어난 성인은 사제가 된 이후 크라쿠프의 대주교를 거쳐 교황이 되었다.
※ [역자 주]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ła)와 안젤로 론칼리(Angelo Roncalli)는 요한 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 두 분 교황의 이름으로, 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동시에 시성되었다.
당신의 흰 무덤 위를 덮고 있는 것은
순결한 생명의 흰 꽃다발
당신을 보내드리고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수많은 것들이 제 눈물로 씻겨 내렸습니다
어머니에게 바친 이 시는 1939년 봄 크라쿠프에서 성인이 쓰신 것이다. 가슴 저미는 단어 하나하나가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는 어린 카롤 보이티와의 비극적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슬픈 사연은 미래의 성인이 9살 되던 해에 생긴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에밀리아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출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사들도 그녀의 출산을 만류했다. 성인을 출산한 이후 입원을 반복하던 어머니는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지면서 9년 만에 생을 마감한다.
보이티와가 짊어졌던 ‘베드로 직무’(교황직)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인간의 생명, 특별히 취약한 조건에 처해있는 생명을 보호하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열정은 성인의 마음 안에 간직된 모성애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잔나 베레타 몰라(Gianna Berretta Molla; 1995년에 시복, 2004년 시성된 성녀)의 모습을 교황이 매우 친근하게 느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소중한 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된 어머니의 모범을 보면서 교황은 당신의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바도비체의 시민들이 교황의 모친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 보이티와를 ‘미혼모의 집’의 수호자로 추앙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사업은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임신의 결실을 지키는 길을 선택한 여성들을 돕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9년 6월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을 때 한 말이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라는 큰 선물에 감사합니다. 이 집이 저의 어머니 에밀리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를 세상에 데려다 주시고 어린 시절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어머니께서도 이 사업을 지켜보시리라 믿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고 난 후 3년 만에 또 다른 깊은 슬픔이 보이티와의 가족을 강타했다. 카롤이 우러러보며 사랑하던 형 에드먼드가 26세 초반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에드먼드는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희생자를 치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많은 의사와 간호사의 영웅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에드먼드는 의사였으며, 그 당시 성홍열에 걸린 어린 소녀를 치료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백신이 없었으므로 이 젊은 의사는 자기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본인이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미래의 교황인 카롤은 형 에드먼드의 죽음이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주변 환경을 덮친 비극적인 상황이 더욱 그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한 단계 성숙해져 있었던 소년 카롤은 이 시련을 받아들인다. 형의 ‘직무 상 순교’의 모범이 카롤 보이티와의 기억에 영원히 새겨진다. 형은 카롤을 공부하도록 독려하고 운동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함께 어린 동생 카롤을 키워준 사람이 형 에드먼드였다.
카롤은 12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둘이 남게 되었다. 폴란드 군대의 예비역 장교인 아버지는 선하고 신심 깊은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많은 비극을 겪었어도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 남은 아들을 돌보며 성장하는 과정의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성실함, 애국심,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몸소 보이는 모범을 통해 가르치면서 아들의 인격형성을 위해 헌신했다. 그 결과 어린 카롤 보이티와는 거의 제2의 천성을 얻게 된다. 교황이 되고 나서 카롤은 친구인 앙드레 프로사드(André Frossard) 기자와의 대화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제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겪으신 그토록 큰 슬픔은 그분을 끝내 가두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으로 엄청난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분의 고통은 기도가 되었습니다. 기도할 때 무릎을 꿇은 아버지를 보는 단순한 행위 하나가 제 신앙심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제 사제성소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제서품 50주년을 기해 발간한 자서전 「선물과 신비」에서 교황은 아버지를 회상한다.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을 말로 제게 전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양이 어떤 면에서 제게는 첫 번째 신학교였습니다. ‘가정 신학교’ 같은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대담집 「희망의 문턱을 넘어」에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책 이야기를 한다. 그 책에서 교황이 본 것은 성령께 바치는 기도였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매일 그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은 비토리오 메쏘리(Vittorio Messori; 이탈리아의 기자이며 가톨릭 작가)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그래서 그날부터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진실한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예배는 장소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것이라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의 성장기는 주님과 그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시기가 되었다. 그 당시 카롤과 그의 아버지는 크라쿠프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그의 조국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고 점령당하게 된다. 가족의 고통은 복잡하게 얽히고, 조국 폴란드의 고통과 한 덩어리로 뭉쳐버린다. 결국 미래의 교황은 아버지를 여의고 만다. 그의 나이 21세가 되던, 1941년 2월 18일 추운 겨울밤이었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젊은 카롤 보이티와는 이제 홀로 세상에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젊은이는 부모님과 형의 사랑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범과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옆집의 성인들”이라고 말한 이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미래의 교황은 고통을 이겨내는, 죽음마저도 억누르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긴 인생여정 속에서,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전 세계를 다니면서 언제나 가족과 함께하는 사람, 그는 카롤 보이티와였다.
그는 어머니처럼 용기 있게 생명을 지켰다. 형처럼 끝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았다. 아버지처럼 그리스도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이 활짝 열려있어 그는 두렵지 않았다.
출처: Vatican News, 14 May 2020, 12:30,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20-05/a-saint-and-his-famil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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