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회심" - 위기상황의 신앙생활

MonteLuca12 2020. 5. 10. 10:58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깨닫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고 믿게 됐는지 모른다.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를 찾아낸 것이다. 연륜이란 단어를 우리말 사전은 ‘숙련의 정도’로 해석한다. 세월이 가져다준 것은 경험의 축적이요 판단의 기술이다.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란 훈화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아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어렴풋이, 막연히, 내 기준대로 해석하고 돌아서는 생각의 꼬리엔 늘 ‘뻔한 얘기’라는 딱지가 달려있었다.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기 위한 고통의 강”이란 표현을 두고는 수사적 기교를 뜯어보기에 바빴다.

 

섭리를 알아듣는 것은 다르다. 기술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고 지혜의 작용도 아니다. 빅데이터로 해결하려드는 것은 번지를 잘못 찾아 헤매는 배달부 꼴이다. 세월도 나이도 소용없다. 정보도 재능도 자랑할 것이 못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결국 충격적 한방에 머리가 깨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나비가 태어나는 ‘완전탈바꿈’의 과정을 말로만 지껄였다. 고통과 아픔을 인간의 말로 해석하려했고, 글로만 표현할 줄 알았다. 새로운 것을 본다. 희년의 정신이 드러나고 십자가에 묻은 피가 눈에 확 들어온다. 제도라는 껍질이 벗겨지고, 세상의 법도는 깔고 앉아 안주했던 때묻은 방석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고통이 하느님의 진정한 선물이라는 깨달음이 기생 미물의 등을 타고 다가왔다. 에우레카(Εύρηκα)!

 

교황청 공보실장이셨던 페데리코 롬바르디(Federico Lombardi) 신부님의 네 번째 기고문을 전해드린다. 지난 4월 29일 신령성체(神領聖體)에 관한 두 번째 글을 실은 이후 다시 올린다.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가져다준 신앙의 깨달음과 변화에 대한 영성적 설명을 들어보자.

 

회심 - 위기상황의 신앙생활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의 “위기상황의 신앙생활” 시리즈의 네 번째 기고문: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회심에 대한 또 다른 요구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심각하게 아프거나 병에 걸릴 걱정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황 상태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이런 기회에 하는 경험은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나게 합니다. 그 결과는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보였던 것들과 공들여 추진해온 과제들이 궁극적으로는 우연한 만남이었고 덧없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나가는 것과 지속되는 것으로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취약성을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 앞에서 미소한 존재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비록 의학과 과학이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 해도 우리의 운명을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현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우리는 겸손해지게 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 민감하고 세심하게 됩니다. 그들의 관심과 인간적 정감을 고마워하고 영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나 우리의 힘이 회복되면 이러한 마음과 자세는 점차 사라지고,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되살아나, 계획했던 일에만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즉흥적인 만족에 집착하게 됩니다. 더 값진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인간적 관계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은 뒷전에 밀리고 맙니다. 어떤 면에서 아플 때의 우리 모습이 더 나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강해지면 곧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팬데믹이란, 전염병이 널리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밀어닥쳐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우리 자신의 취약성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살던 일상과 세상의 갖가지 일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 큰 고통과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그저 악한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기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설교에는 ‘회심’이라는 단어가 강한 어조로 자주 등장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그리 좋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에 대해 우리가 의문스러워 하고 편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잘못도 없는 결백한 상태가 아니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 사순시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우연의 일치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과 함께 시작된 사순시기 내내 우리는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회심에로의 부르심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에스테르기와 아자리아의 노래 같은 성경을 통해 위대한 참회의 기도와 예언적 외침을 듣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강력한 부르심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세상의 불행을 복수하시는 하느님의 형벌로 보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책임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고 피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처음부터 죄의 결과로 물들어 있었다는 생각에 빠져있어서도 안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조만간 이 팬데믹은 지나갈 것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끝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몹시 서두르고 있고 조속히 이 시련이 끝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생각입니다. 연대의 정신은 우리들 중 가장 약한 사람들이 더 이상의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게 해줍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앞날을 기대하게 하고 사랑은 우리를 부지런해지라고 촉구합니다. 최소한 조금이라도 회심할 것인지, 아니면 종전의 모습으로 즉시 돌아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답을 줍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이 세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지배하거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와 함께 우리 자신들도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 앞에서 더 겸손해질 때에만 지성과 과학이 증진되고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빨리 다시 시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즈음 우리는 많은 것이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의료시스템과 학교운영제도에 대하여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디지털 영역의 가치와 발전 가능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의학 분야는 더욱 발전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기술적인 개념의 답을 생각하고, 효율성과 조직의 합리성 측면에서 해답을 찾으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분야는 모두 잘되고 있고 좋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심오한 영적회심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피조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피조물과 평화를 이루면서,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들이 모두 함께 보다 나은, 진정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출처: Vatican News, 08 May 2020, 18:34,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vatican-city/news/2020-05/conversi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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