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허름한 벽돌집의 문을 열고 나선다. 문설주 옆에 박힌 삼색원통이 어스레한 시장골목의 바닥에 맥빠진 몸짓을 투영한다. 서울 서편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작은 산등성이 너머에 얼굴을 숨긴 해가, 서해를 덮은 하늘을 비추고 있어 어둠이 세상을 다 덮지 못한 탓이다. 주기적으로 삐걱대며 신음을 토하는 원통의 회전판을, 수명이 다된 전구가 죽을힘을 다해 돌리고 있으니 하늘의 조명이 달빛으로 바뀐다 해도 이 골목을 더 밝게 비출 여력은 없는 것 같다.
40년도 훨씬 더 된 기억이 방금 이발한 머리 위에 염색약처럼 발라진다. 그때 나는 지어진지 몇 달밖에 안된 소양강댐의 턱밑에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톱날처럼 이가 빠진 접이식 면도용 칼에 턱을 맡기고 등받이가 가로 펴진 의자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의자 옆 팔걸이에 걸린 가죽 띠 위를 서걱대며 왕복하는 칼날이 내 얼굴에 흠집 내지 않게 잘 갈아지기를 바라며 조바심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물기가 꽉 쥐어진 손바닥까지 내려와 흥건히 고이고 있었다.
내 머리를 깎아준 사람이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그 이발 기록 중 9할 이상은 한 사람의 실적이다. 삼십년을 넘게 내 머리카락을 받아낸 영감님의 얼굴을 마지막 본지가 3년도 더 지났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아이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혼잡한 도심에서는 눈 씻고 볼라 해도 사라지고 없는 삼색원통에 끌려 이곳까지 왔다.
깎아낸 것이 한줌에서 조금 더 된다. 어두워진 노인의 눈을 피해 쓸어내는 빗자루 사이로 빠져나온 작은 토막들이, 입혀놓았던 칠이 벗겨진 채 바닥에 붙어있다. 젊은이의 현란한 가위질과는 거리가 먼 늙수그레한 노인의 손길이 어쩌다 한 번씩 아까운 머리털을 뜯어내지만 구수한 입담에 잔소리 퍼부을 겨를이 없다. 겨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까운 마음이 줄어든 것이다. 여백이 늘어난 삶, 늙은이 행세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바다처럼 넓고, 평야 같이 고요한 마음에 사랑을 가득 담고 평생을 사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신 성녀의 고뇌와 아름다운 생애를 묵상한다.
모든 이를 위한 성녀 마더 데레사
콜카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 시성 4주년을 맞아, 시복시성 청원자로부터 오늘날의 상황에서 성녀의 생애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들어본다.
2016년 9월 4일,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에 몰려 들었다. 보잘것없는 한 수녀의 시성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친 콜카타의 수녀 데레사였다.
그날 미사를 집전하며 시성을 선포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더 데레사를 살아있는 성녀였다고 말했다. “수녀님은 태중에서 죽어가는 아기들과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셨습니다. 성녀께서는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가난의 고통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콜로제이축(Brian Kolodiejchuk) 신부는 자기가 그저 “수녀님”이라고 불렀던 미약한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세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1997년 데레사 수녀가 선종한 후 2년 뒤에 브라이언 신부는, 성녀의 시성시복을 청원하였으며 지금은 마더 데레사가 설립한 수도회인 ‘사랑의 선교회’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브라이언 신부는 바티칸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데레사 수녀가 우리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대의 성인’이라면서, 사랑에 대한 그녀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도 작은 일과 평범한 행동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성녀를 닮아 그분이 실천하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브라이언 콜로제이축 신부는 로마 산 그레고리오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의 수녀원에서 데레사 수녀를 처음 만나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었다. 그 후 뉴욕과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함께 일하면서, 데레사 수녀와 함께 티후아나에 남자 수도회를 설립했다. 현재 이 수도회는 아프리카, 인도, 과테말라, 로마 등지에서 활동하는 28명의 사제가 있고 60명이 사제 양성 중에 있다.
그는 성녀의 삶과 영성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 중 하나가 「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Come Be My Light)이다. 이 책은 성녀 자신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쓴 수백 통의 편지 원본을 토대로 엮은 것이다. 성녀가 말하는 ‘어둠’과 ‘영적인 고독’을 비추어주는 빛의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성녀의 이런 영적 체험은 그녀가 일생을 통해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더욱 가깝게 지내도록 만들었다.
이 시대의 성인
브라이언 신부는 무엇보다 성녀가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현대의 성인’이며,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인기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후에 교회 밖으로까지 그렇게 넓은 반향을 일으킨 성인은 없었습니다.” 브라이언 신부는 덧붙인다. “일생 동안 노벨평화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을 받은 성녀의 명성은 교회의 담을 훨씬 뛰어넘어 널리 퍼졌습니다.”
기쁨의 사도
“그러나 성녀는 인기 있는 분이라서 만날 수 없거나 거리를 두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수녀님을 만나보면 절대로 그분처럼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수녀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녀님은 어둠과 영적인 고독을 겪던 시기에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도 그분은 기쁨의 사도가 되려는 열망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가르쳐주신 분
“사랑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성 토마스처럼, 성녀는 사랑이 진정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랑이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문화적 인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수녀님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위안을 받지 못했을 경우에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을 하는 분들이 경험하는 바와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사랑이 이웃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선한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때로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녀님에게서 훌륭한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수녀님이 잘 가르쳐 주십니다. 수녀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특별한 사랑입니다. 가장 작은 일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대부분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태도가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사랑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런 미약한 일들 중 일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 한다면 틀림없이 상대방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어나는 세상
기자는 브라이언 신부에게 묻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불공정한 경제시스템으로 인하여 가난에 내몰리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서 마더 데레사는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까? 특히 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시련 중에 신음하는 세상에 성녀는 어떤 의미를 갖는 분입니까?”
브라이언 신부는 가난의 이면에 감춰진 구조에 관해서 성녀가 말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답한다. 성녀는 그런 비판에 이렇게 대응하곤 했다고 설명한다. “불의의 정곡을 파헤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그것은 분명 제가 받은 성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을 주라는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사람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브라이언 신부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러분은 코비드-19 팬데믹의 비극적 상황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당신의 삶의 현장에서 당신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브라이언 신부는 말한다. “배고픈 이들을 위해 작은 용기에 음식을 담아 전해주는 일이라든가,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태수습에 참여하는 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작지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전체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일들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04 September 2020, 16:00, 번역 장주영
www.vaticannews.va/en/church/news/2020-09/saint-mother-teresa-kolkata-annivesary-canonizati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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