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MonteLuca12 2020. 7. 11. 19:55

지렁이가 땅 위로 기어 나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십중팔구 밟히거나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숲정이 멤버들의 탐욕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너무도 뻔하다. 알량한 염려가 스쳐간다. 어둡고 찬 땅속이 싫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짧게라도 밝고 따뜻한 세상맛을 보는 것에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필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프라이팬처럼 지글지글 끓을 아스팔트 위까지 찾아 나서지는 않는 것이 옳을 걸 그랬다.

 

캐나다 서부의 작고 예쁜 마을에서, 뱀처럼 이어진 화차(貨車) 행렬을 보고 들었던 생각을 떠올린다. 끝도 없이 긴 열차(列車)의 몸통을 이끌고 가는 기관차의 힘이 놀랍다. 동인(動因)이라는 어휘를 만들어 쓴 적이 있다. 의욕을 유발하는 동기를 말하고 싶었다. 삶의 활력을 불어 넣는 즐겁고 행복한 계기를 표현하려고 했다. 사랑도 믿음도 동인을 따라간다. 자선도 선행도 무언가에 이끌려 나온 덕행이다.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마음도 그것을 끌어주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 돌아보는 긴 인생열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짐은 자꾸 쌓이는데 동인이 줄어든다.

 

지난 반년 동안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된 단어가 “코로나”라 해도 따질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귀한 낱말의 뜻이 이렇게 부정적 의미로 바뀔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 몰아닥친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더 이상 시련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소위 ‘포스트 코로나' 세상에 적응하며 사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동인과 함께 사그라드는 것이 적응하는 능력이다.

 

며칠 지나긴 했지만 미리 옮겨두었던 교황님 말씀의 일부를 추려서 싣는다.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친 광풍이 헤집어놓은 삶의 길목에서, 그분이 그토록 애달프게 호소하시는 ‘형제애’의 의미를 곱씹는다. 머지않아 만나게 될 세상에 발을 디딜 동인을 받아든다.

 

람페두사 섬의 불법 이민자들을 방문한 교황 (2013년 7월 교황 즉위 직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프란치스코 교황이 람페두사 섬을 방문한지 7년이 지났다. 그 당시 교황은 우리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느끼고, 그렇게 대하자고 호소했었다. 그 호소가 지금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들린다. 코로나 대유행 지나가고 난 이후를 대비하면서 드는 생각은 혼자서는 회생할 방법을 찾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걱정이다. 형제애로 서로를 보듬는 것이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교황은 말한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에게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그 물음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우리의 답을 기다리는 외침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중해 한 가운데에 있는 섬의 ‘불법 이민자 수용소’에서 집전한 미사의 강론을 통해 한 말이다. 교황이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을 방문하여 전 인류를 향해 이 질문을 던진 것은 7년 전의 일이다. 그날의 여행은 몇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교황즉위 직후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하는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유럽의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에서 교황은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그것은 바로 교황 자신이 말하는 “바깥으로 나가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이다. 중심에 있을 때보다 한 발짝 비켜나서 보면 현실상황을 더 정확히 볼 수 있다고 교황은 단언한다. 전쟁과 처참한 삶을 피해 고향을 떠난 이민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꿈꾸고 있었다.
 
그날 교황은 카인과 아벨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직무를 개시했던 곳, 람페두사 섬 한가운데에서 ‘형제애’에 관한 화두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이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제기된 근본적인 질문이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있어서 교황직이란, ‘형제’(Brothers)라는 축을 중심으로 그를 에워싼 목자로서의 직무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2013년 3월 13일 저녁, 전 세계인들에게 한 인사에서 사용한 첫 단어가 ‘형제’였다. 굳이 말하자면 아시시의 빈자(貧者)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한 그분의 DNA에는 이미 ‘형제애’가 깊게 새겨져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이 오로지 ‘형제’(friar, frater, brother)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분이다.
 
[역자 주] 작은 형제회는 탁발수도회다. 탁발(托鉢)은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담은 바리때에 목숨을 맡긴다는 뜻으로 ‘얻어먹는다’는 의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수도원으로 삼아 살면서 탁발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던 형제들이 머무르던 곳을 ‘수도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처’나 ‘집’, ‘장소’로 불렀을 만큼 탁발 정신을 철저하게 살았다. (가톨릭평화신문 제1311호, 2015. 4.26) 그들은 성직자가 아니었으므로 ‘형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프라테르’(frater)에서 따온 ‘프라이어’(friar)라는 호칭을 썼다. (두산백과 참조)
 
교황이 매우 의미 있는 다른 곳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같은 표현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9월 13일,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레디풀리아 군인묘지(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를 방문했을 때, 교황은 강론을 통해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느님과 카인이 나눈 대화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 4, 9)
 
교황은 자신의 아우를 지켜주기를 거부하고, 모든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부정하는 카인의 모습에 모든 악의 뿌리가 내려져 있다고 말한다. 전 인류를 뒤흔들어 놓은 죄악이 거기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정반대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형제자매를 돌보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거나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가 베네딕토 16세 명예교황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방식도 ‘형제애’였다. 「인간의 형제애」에 관한 공동 선언문이 발표되고 나서 교황의 수많은 직무가 모든 사람들 앞에 확실하게 드러나 분명히 알게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직을 물려받은 초기에 심었던 ‘형제애’라는 씨앗이 「인간의 형제애」 공동 선언문이라는 꽃을 피웠다면,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미증유의 상황은 ‘형제애’에 관한 문제를 책임 있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인하여 짧은 기간 놀랍게 변화된 세상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2013년 7월 8일 햇살이 따가운 람페두사에서 제기된 이 질문과 그 안에 담긴 호소는, 바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는 물음이다.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만심과 언제나 그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왔다는 오만한 논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들의 공격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게 되었고 믿을 수 없는 무모한 자신감으로 전락했다. 세상은 자신을 떠받칠 수 있는 적절한 기반을 찾지 못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며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반복해서 말한다. 우리가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유일무이한 주춧돌은 바로 ‘형제애’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호소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국가 간의 개발수준이 얼마나 크게 차이가 나는지, 국가 내 소득수준의 격차가 어느 정도나 벌어져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는 형제자매들이다. 폭풍의 노도에 휩쓸리는 배는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서 흔들어대지 않는다. 지난 3월 27일 비에 젖은,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돌풍이 불면 언제나 자아에 가면을 씌우고 있던 상투적인 화장이 지워집니다. 자기 자신만을 걱정하는 우리의 자아입니다. 그리고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복된 공동의 소속감은, 형제자매로서의 소속감이 드러나도록 한 번 더 껍질을 벗겨줍니다.”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수많은 전염병의 대유행에 부딪혀 우리의 양심은 적잖이 마비되어 있다. 전 세계를 휩쓰는 전쟁과 기아와 같은 전염병은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를 바라며 두드리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문은 굳게 닫혀있다. 우리의 양심을 깨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5월 14일 산타 마르타 집에서 봉헌된 미사의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대유행 전염병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7년 전 람페두사 섬에서 했던 호소를, 교황은 오늘 우리에게 반복한다. 우리의 눈이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준다. “우리의 이웃들을 진실로 형제와 자매로 생각한다면, 형제애로 묶인 우리라는 공동체 밖의 상대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상대편도 우리인 것입니다.”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영어로 번역)

출처: Vatican News, 07 July 2020, 15:44,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20-07/wheres-your-brother-from-lampedusa-to-covid-the-challenge-of.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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