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어진 것을 느낀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일러주는 것이다. 옷을 입는 중에 스치기도 하고, 늘 지나는 산책길 모퉁이에서 깨달을 때도 있다. 요전날은 면도를 시작하면서 찾아든 생각이다. 벌써 열 번이나 쓴 면도날을 그냥 집어 든다. 닿는 촉감이 꺼끌한 것을 감지하는 손의 기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자가 관면’이 머릿속을 맴돈다. “좀 덜 깍이면 어때! 볼 사람도 없는데......”
어느 날 바치는 기도는 논리가 정연하다. 형식과 순서도 배운 규칙을 따른다. 기도에 초대할 명단도 빠짐없이 호출한다. 청원의 내용도 치밀하게 배치한다. 약간씩 헐거워지는 집중이 며칠 만에 바닥난다. 습관화된 산책길을 도는 걸음을 따라, 으레 손에 들린 묵주는 기계처럼 돌아간다. 신비 묵상은 자동화된 생산설비가 쏟아내는 규격제품처럼 콘베이어 위에 던져진다. 온갖 잡념에도, 무수한 분심에도 입에 붙은 염경기도는 실패 없이 끝을 맺는다.
새로움에 대한 갈급증이라는 걸 깨닫는다. 오히려 그것은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며 영원히 놓칠 것을 두려워하는 애달픔이다. 생목처럼 한 번씩 올라오는 기억이, 한 번이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후벼판다. 넉넉하고 헐렁한 여정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세상이 변하길 바라는 아둔한 희망이 머릿속을 돈다. 비가 내리면 살짝 흔들리는 감정변화를 떠올리며, 그 싸구려 소망에라도 매달린다. 기댓값이 바닥에 다가간다.
어쩌면 코로나바이러스가 뜻밖의 새로움을 몰고 왔는지 모른다. 그 끝의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토록 새로움을 바랐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짧은 기사로 소개된 신간의 서문, 그 안에 담긴 교황님의 말씀 한마디에 ‘마음풍선’의 꼬리가 끌려간다. 성체 안에 담긴 희망의 빛을 따라갈 채비를 한다.
신간(新刊)의 서문을 쓴 교황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의 시련 속에서 싹트는 희망에 관한 책)
교황은 새로 발간된 책 「친교와 희망」(Communion and Hope)의 서문을 썼다. 이 책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해 황폐화된 사회적 연대를 다시 회복하도록 세계인들을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화요일 발간된 책의 서문에서 교황은 코비드-19로부터 얻은 교훈을 돌아본다.
「친교와 희망」은 발터 카스퍼 추기경과 게오르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공동으로 저술하였으며,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서 믿음을 증거하는데 관한 저자들의 신학적 소견을 담고 있다.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폭풍우처럼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개인과 공공(公共), 가족과 직장 생활을 급격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그 변화는 전 세계를 휘감으며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애통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습니다. 또한 직장을 잃고 재정적 불안 속에서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부활절조차도 각자가 예외적인 방식으로 지내야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한 위안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의 뿌리 찾기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극적인 상황은 인간 본성의 취약한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제약에 매여 있고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 속절없이 당하는 존재입니다.”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해 우리는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가치를 다시 찾아내야 합니다.”라고 덧붙인다.
“이 경험은 우리가 인생의 주요문제들을 잊고 있었거나 신경 쓰지 않고 미뤄두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과, 부차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평가하여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시기에 요구되는 연대
교황은 이를 ‘시련의 시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역설한다.
“이 위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필요한 상황에 처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에 의존하게 되는 인간적 성향입니다. 이 번 위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불의를 인식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의 승리
교황은 많은 신자들이 외롭게 지내야했던 독특한 부활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의 메시지가 신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전염병의 대유행의 시련을 겪으면서 마비된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과 격려를 줍니다. 우리의 연대감을 강화시킵니다. 이것은 과거의 경쟁관계를 일소하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웃들과 짐을 나누어지고 가는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각기 다른 점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의 전염
교황은 바이러스가 가진 전염의 위험성을 ‘사랑의 전염’에 결부하여 말한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이의 마음에 전해지는 사랑의 전달 과정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간병인과 의사, 그리고 사제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이웃사랑의 실천과 영웅적인 헌신에 대해 치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우리는 믿음에서 솟아나오는 힘을 느꼈습니다.”
성체의 단식
교황은 팬데믹의 초기 단계에서 정부가 불가피하게 신자들의 미사참례를 금지함으로써 수많은 신자들이 고통스러운 ‘성체의 단식”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생중계되는 미사는 비상조치였습니다. 그나마도 많은 신자들이 고맙게 여긴 것이었지만 성체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거룩한 제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황은 세계 여러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이 정상적인 전례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감사한다.
"복음 말씀과 성찬례의 거행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는 것은, 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역경이 지나간 후에 직면하게 될 어려움과 도전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힘을 줄 것입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희망과 연대
교황은 이 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과 연대감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며 서문을 마무리한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동행하셨던 것처럼 복음을 통하여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또한 성찬례에서 빵을 나누실 때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죽음을 이겼다.'”
책에 대하여
신간 「친교와 희망」은 지난 6월 바티칸출판사 (Libreria Editrice Vaticana)에서 독일어로 출간되었고, 이탈리아어 번역본은 지난주에 발간되었다.
저자인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의 명예회장이다.
공동저자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05년에 독일 발렌다르 소재, 팔로티네스 철학-신학대학에 발터 카스퍼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와 성직자성의 상담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Vatican News, 28 July 2020, 14:30,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20-07/pope-francis-book-preface-faith-in-coronaviru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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