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외박이 허락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 갇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가고 오는 데 이틀을 잡아먹는 거리 보다도 도무지 집까지 가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갈 곳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성주간의 ‘예절’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남의 성당에서 살아본다는 것은 떨리는 경험이었다. 그보다 외박을 하고 있다는 것에 마냥 신났다고 해야 옳다.
‘성체건립대례’, 옛 용어가 늘 친근하다. 그런데 성유축성미사는 뭐라했는지 기억에 없다. 많은 이들이 ‘사제서품식’에서의 감동만 가슴에 품고 신품성사의 지고한 가치를 생각하는 데에는 소홀하다. 우리의 목자들은 이 미사에서 성품에 올려졌을 때의 서원을 갱신한다. 교황님은 이를 '축성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제 못했다면 오늘 사제들을 위해 작은 기도로 빨랑까하자. 이자를 보태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으로 밝히면 된다.’란 소리가 뒤따랐다. 이는 마치 내가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그 산에서 하시는 말씀 같았다. 어둠을 몰아내 버린 일출처럼 더 힘찬 말씀이었다. “난 지금도 사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밝아오는 차쿠의 아침에 대고 나는 웃으며 고백했다. (차쿠의 아침 중에서; 소설 속의 최양업신부님)
사제들은 기름을 붓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교황은 성목요일 아침, 베드로대성당에서 집전한 성유축성미사에서 "예수님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세 가지 은총에 대해 강론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목동들, 왕들, 선지자들의 방문을 받았고, 십자가의 길에서는 베로니카, 키레네 사람 시몬, 도둑, 백부장 등 많은 군중 가운데 계신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주님은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군중’이라는 단어를 ‘얼굴도, 이름도 없는 인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복음에 나타난 군중은 예수님을 뵙고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교황은 강조한다.
세 가지 은총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따라갈 때 나타나는 은총에 대해 교황은 이야기한다. 대조적으로,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싶어했던 사도들의 태도는 잔인에 가까운 짓이라고 말한다. 성직자 중심의 ‘교권주의’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고 교황은 말한다.
예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경이로운 은총’이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 놀라운 일이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놀라신다. 교황은 백성들이 마침내 ‘분별의 은총’을 받는다고 말한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분의 능력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침내 예수님이 자기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복음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군중’을 크게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께 간택되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로서, 가난한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이라고 교황은 말한다.
사제들이 기름 부을 때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
교황은 성유축성미사를 위해 모인 사제들에게 특히 성직자로서의 일치를 강조해서 말했다. "우리의 복음적 모델은 우리가 대면하는 바로 그 군중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기름부으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영혼의 모상이자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 하나하나는 모두 육화된 영혼들입니다.”
교황은 사제들에게 고백한다. "저는 사람들에게 기름 붇는 예식을 할 때면 그 기름으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성직자들은 기름 붇는 행위를 통해 축성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병에 든 기름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름부음은 우리 자신을 나누어 주는 것이며, 우리의 성소와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애정으로 새로이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은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속 깊숙한 곳의 거룩한 영을 새롭게 하시어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과 온 세상을 위해 당신의 자비를 간구하는 데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강론을 마무리했다.
출처: Vatican News, 18 April 2019, 12:18, By Christopher Wells / 번역 장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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