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자꾸만 지워진다.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잃은 것만큼이나 잊은 것도 많다. 기억에 남은 것을 추려봐야 몇 줌뿐이다. 가난했지만 그래도 정이 배어 있었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동기간처럼 끈끈했다. 얽히고설킨 인연이 몇 타래씩 묶여있었다. 뒤엉켜 뭉쳐놓은 추억이 몇 다발씩 쌓여있었다. 정(情)을 머금었던 고리가 삭아버려 거기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무정한 바람에 휘날리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어머니는 온 동네가 알아주는 마당발이셨다. 몇 분 노망기를 보이는 할머니를 빼고는 읍내를 주름잡는 왕언니였다. 고무신집 아주머니는 엄마를 형님이라 불렀다. 기름집 안주인은 대모님, 이불전(廛) 이모는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철물점과 공작소, 두 부잣집 마나님들은 동서(同壻) 간이었다. 그 바닥에선 내로라하는 부인들이었지만 엄마 앞에선 양순한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렸다. 나는 그 아주머니들로부터 매년 두 번, 개학 철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분들이 마련한 것은 신학교에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의 자리였다. 그것이 단지 신앙심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믿는 이유는, 꼬마 신학생이 나 말고 또 있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그분들께 초대된 것은 울 엄니의 위세 덕분이었다.
무엇 때문에 힘든 것일까? 슬프고 허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서 생긴 고통도 아니고, 가슴 에도록 서글픈 사연을 붙들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말라버린 정과 식어버린 우애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엄마가 휘감아 추어올리던 치맛바람에는 늘 익숙한 냄새가 묻어있었다. 내 후각에 깊숙이 새겨진 어머니의 젖비린내가 몹시 그리워진다. 교황님께서 내 마음을 읽으셨나 보다. 아파서 아픈 것 보다, 사랑을 그리는 마음이 더 아픈 것이란 말씀이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을 흔들어 깨운다.
사랑의 결핍으로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
주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교황은, 우리가 지은 죄와 편견을 묻지 않으시고, 과거의 실수로 인해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친 순례자들에게 한 훈화의 주제는 이 날의 복음인 마르코복음 5장 21~42절의 말씀이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두 가지의 극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상황은 피해갈 수 없는 실존의 문제인 병고와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교황은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못 본 체하시지 않습니다. 고통도 죽음도 마지막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두 가지의 치유를 징표로 보여주셨습니다.”
건강과 사랑
전염병의 대유행으로 인한 고통이 여전히 최대의 관심사인 시기에 교황은 특별히 하혈하는 여자를 낫게 하신 기적에 관해 이야기한다.
“병 자체의 아픔보다도, 공동체로부터 소외됨으로써 느끼는 애정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하혈하는 여인을 정결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과 가족들로부터도 버려져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걸리는 가장 심각한 병은 사랑의 부족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효과 없는 사랑 찾기
이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체험하는 세상살이의 전형을 보여준다면서, 우리의 병이 어떻게 하면 치유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고 교황은 말한다.
“그녀는 자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숱한 고생을 하고 많은 돈을 썼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족한 사랑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성공과 돈을 얻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는 등 많은 애를 쓰지만 헛수고에 그치기 일쑤입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마침내 예수님과 직접적인 접촉을 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만나러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우리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당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사랑의 결핍으로 겪는 아픔도 치유될 것입니다.”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눈길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느끼신 예수님께서는 몰려든 군중 사이에서 당신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눈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믿음으로 가득 찬 얼굴과 마음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한꺼번에 보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눈길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과거의 상처와 실수에 머물지 않습니다. 죄와 편견을 뛰어넘어 마음속까지 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소외당했던 가련한 여인을 깨끗하게 고쳐주시고 그녀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급기야 그녀를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상처받은 삶을 치유하는 것은 사랑 뿐
마지막으로 교황은 삼종기도에 참례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눈길을 체험한 분들은 상처입고 외로움을 느끼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만 보고 돌아서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기를 바라십니다. 그 눈길은 비판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눈길이 필요합니다. 사랑만이 상처받은 삶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27 June 2021, 12:11, 번역 장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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