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젊은 이민자의 삶

MonteLuca12 2020. 4. 17. 15:09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머리와 손이 따로 놀고 생각과 발이 엇갈린다.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꿈 사태에 기쁨과 희망이 쓸려 내려간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맥 풀린 눈동자로 까마득 멀어지는 내일을 무심코 바라본다.

 

오늘은 봄비가 내린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색다른 것을 원하는 마음은 평범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다. 씻어내는 것은 세상을 뒤덮은 흙먼지일 테지만, 천지간을 가르는 공기의 느낌이 다른 것만으로도 기대의 싹이 또 하나 움튼다.

 

재의 수요일 이전부터 시작되어 사순시기를 관통한 긴 과정이 부활의 기쁨마저도 특별하게 가져다준다. 진정한 기다림의 의미가 이제야 어렴풋 가슴에 스민다. 여백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어제 만난 신부님의 말씀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새해를 맞으며 받은 특별한 부르심이, 오늘 찾아온 봄비처럼, 우리의 인생여정에 그분께서 끼어 넣으신 새로움일지 모른다. 그런 깨달음이 명확하게 초점을 잡으려 애를 쓴다.

 

성소에 담긴 섭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오묘하다. Vatican News, ‘삶의 이야기’ 꼭지에 실린 알바니아 이민자의 이야기가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부르심의 의미를 생각하는 봄비 내리는 날이 성소주일과 멀지 않다.

 

알바니아 티라노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아르잔 도다이 신부

무신론의 교육을 받은 젊은 이민자

 

1993년 작은 배에 몸을 실은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용접공으로 일했다. 할머니가 불러주신 노래가 믿음의 씨앗이 되어, 그의 마음 안에서 자라고 또 자라, 결국 그를 사제로 길러냈다.

 

티라나에서 걸려온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 목소리는 그에게 일어난 일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가 받은 약속의 소식이 전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느낌은 아주 생생했다. 수없이 많은 미소한 존재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는 위대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는 늘 그렇게 하나의 보따리 안에 담겨있다.

 

43세의 아르잔 도다이(Arjan Dodaj)는 알바니아 해안의 라쿠르빈(La-Kurbin)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도착해 이민자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16살이 되던, 1993년 9월, 무덥고 별이 빛나던 밤에 자신의 나라를 떠나 미래를 찾아 나선다. 가난한 가족을 돕기 위해서였다. 용접공과 정원사로 하루에 10시간 이상 닥치는 대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집에서 느끼던 따스함을 이곳 공동체 안에서 발견한다. 거기서 그가 얻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안에 담긴 사랑이었다. 그의 DNA에는 할머니가 노래하면서 심어놓으신 그리스도교 신앙이 살아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마리아 공동체 집’에 속한 ‘십자가의 아들의 사제 형제회’ 회원으로 그를 성품에 올렸다. 2017년에 그는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주)로 모국에 돌아온다.

 

[역자 주]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신앙의 선물」에서 규정한 해외선교 파견 사제. 수도회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해외 선교를 교구 사제들도 소속교구를 변경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게 정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

 

어린 시절

 

아르잔은 공산주의자인 알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연히 그의 교육환경은 무신론적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주변에는 신앙을 상징하는 어떤 표징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공산주의의 억압을 견뎌낸 것이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그러나 조부모님은 주님께 기도하는 분들이었다.

 

아르잔에게 처음으로 믿음의 말씀을 심어주신 분은 외할머니였다. “하느님의 작용을 처음 느끼게 한 것은, 저의 머리와 영혼에서 반복되는 암송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위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할머니는 완전히 자유로운 모습으로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글을 배우지 못한 그분들은 노래로 기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운율을 따라 노래하면서 교리를 익혔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에 오고 나서야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사에 관한 내용은 할머니가 집에서 일하고 청소하면서 부르시던 노래 속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계속 노래를 부르셨고 제가 배운 것은 그 노래의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처음 외운 것은 성모송의 후반부입니다. 할머니는 늘 제게 그 부분을 외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제 안에서 작용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이주민

 

“공산주의가 붕괴된 직후 저는 이탈리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때는 정상적으로 비자를 받을 수 없었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터보트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곳으로 떠난 보트가 모두 다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몰락 직후 아르잔은 나라를 떠나려고 마음먹는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처음 타려던 배는 부서졌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때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데 엉켜 모여 있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없는 모험이었고 생생한 탈출의 현장이었습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저는 제가 살던 도시의 해안에서 떠나는 배들 중 하나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떠나던 날은 1993년 9월 15일 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바다는 매우 잔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배에 저의 모든 것을 실었습니다. 제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모습으로 별이 가득한 밤에 그 해안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제 삶과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아픔을 부여안고 제 가슴은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탄 보트가 도착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의 눈물과 희생, 그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의 우여곡절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결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 중 몇몇이 그보다 조금 먼저 이탈리아로 이주한 덕분에 아르잔은 드로네로에 피난처를 구했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의 토리노 근처에 있는 쿠네오市에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용접 일을 배웠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주로 자전거 프레임을 용접했습니다. 건설현장의 잡역이나 정원관리 같은 일을 닥치는 대로 다양하게 했습니다. 형편없이 가난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을 따라 성당의 모임에 가게 된다. “저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일하고 저녁이 되면 피곤한 몸으로 집에 가기 바빴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성당에 가면 훌륭한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 공동체의 집’ 회원인 마시모(Massimo) 신부님이 지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에 제게 절실히 필요한 도움을 거기서 받았습니다.”

 

신자가 되고, 사제가 되다

 

아르잔은 1997년에 세례를 받는다. 나중에 그는 로마에 있는 ‘마리아 공동체의 집’ 소속 ‘십자가의 아들의 사제 형제회’에 입회하여 그곳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다. 그의 부모는 사제가 되려는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그가 이탈리아에 상륙한지 10 년째 되던 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1993년, 제가 이탈리아에 도착하던 해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저의 조국 알바니아를 방문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막 독재정부에서 벗어난 때였습니다. 마치 뚜껑이 열린 참호 같았을 겁니다. 교황님은 지독한 불행과 빈곤에 찌들은 참상을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혁을 갈구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티라나에서 슈코더르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수많은 아이들과 수많은 국민들이 교황님의 차를 에워싸고 행진하던 광경을 기억합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님도, 마더 테레사 성녀께서도 언제나 제 인생길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독재정권에서 벗어났을 때, 성녀께서는 우리에게 부드러움과 사랑, 선함과 희망의 향유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세상의 여러 지역에 있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방법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역자 주] 알바니아인들은 마더 테레사가 자기 나라 출신이라고 믿는다.

 

아르잔 도다이 신부는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로마의 알바니아 공동체 주임사제가 된다. 2017년 티라나 대교구의 교구장 조지 안토니 프렌도 (George Anthony Frendo) 대주교는 아르잔 신부에게 교구에서 일하도록 요청한다. 이 제안에 대해 ‘마리아 공동체의 집’ 원장인 지아코모 마르티넬리 신부와, 로마교구 총대리 안젤로 데 도나티스(Angelo De Donatis) 추기경이 모두 동의했다. 그 후 아르잔 신부는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로 본국에 돌아온다. 그것은 소속교구를 바꾸지 않고 다른 교구에서 한시적으로 선교하는 선교 사제를 말한다.

 

티라나 - 두러스 대교구의 보좌 주교

주교 서품

 

3년 전 조국 알바니아로 돌아온 그는 티라나의 보좌 주교가 된다. 지난 4월 9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를 티라나-두러스(Tiranë-Durrës) 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한 것이다.

 

도다이 신부는 주교로 임명된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적도, 그것을 원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교구 사제로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제가 매일같이 함께 생활했던 공동체의 가족들과 우리에게 맡겨진 교구민들과 함께했던 나날이 더 없이 즐거웠습니다.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임명에 따라 또 다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주님과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이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교회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알바니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 국가다. 그곳은 옛날부터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공존하는 상징적인 땅이었다.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 신자들도 교황의 선택을 반기고 있다. 새 주교 도다이는 자기의 조국이 자랑하는 ‘공존’의 유형을 이렇게 밝힌다. “그것은 종교적 관용이 아닙니다. 단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조화이며 화목입니다. 위대한 협력과 상호지원의 정신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처: Vatican News, 14 April 2020, 13:55,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church/news/2020-04/pope-bishop-appointment-dodaj-albania-tira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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