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가 있으면 따르게 되지만 권위적인 사람은 재수 없다. 조직을 지배하는 힘이라도 권위로 누르려는 집단은 심한 저항에 부딪쳐 속이 곪는다. 가정이 화목하고 싶어도, 회사가 잘 굴러가려 해도 권위가 버텨주는 기강이 필요하다. 계급도 지위도 권위를 먹고 살고, 깨끗하지 못해 흔들리는 권력도 권위는 지키려 노력한다.
권위는 얼핏 자유나 평등과 반대 개념으로 이해된다. 부드러운 것 보다는 딱딱한 것에 가깝고, 따뜻한 분위기가 아니라 찬바람이 부는 느낌이다. 마음에서 우러나 올려드리는 성의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와 억지로 받아야하는 강제적인 요구다. 고루한 형식에 매여 있고, 무시하는 듯한 교만이고, 인정머리 하나도 없는 놈들의 완장이다. 힘없고 줄 없는 민초들에겐 잘나고 치사한 인간들의 전유물이다.
교회의 권위는 다른 것이길 바란다. 완전할 수가 없어 생기는 웬만한 허물은 덮어서 가려준다. 진정한 의미의 자원봉사와 희생이 살아있는 곳이 교회다. 바라는 것을 얻으려 돈이 오가지 않고, 출세를 위해 관계를 맺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의 순종과 존경은 순수하고, 서로가 나누는 사랑은 아름답다. 아쉬움이 있다면 일방통행, 길들여져서 둔해진 감각, 그런 것들이다. 안타깝지만 교회가 권위적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걸어 닫고 주저앉은 안방 권위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교황님의 예리한 현실 감각에 혀가 내둘러진다. ‘사목적 정신분열증’이란 지적이 섬뜩하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문맥의 해석에 맡기고 직역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위선’이고,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펼쳐 말려야할 음습한 해악이라는 경고를 듣는다.
권위의 원천은 증거하는 삶
교황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과, 진정한 권위와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는 사목자들의 해악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증거하는 삶이 아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교황은 지난 화요일 미사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는 마르코복음의 말씀에 대해 강론했다. “복음사가는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알려줍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의 권위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율법학자들이 행사하는 권위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전문적인 율법교사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주님의 권위는 쉬지 않고 다니며 가르치고 치유하고 들어주시는 ‘주권(lordship)’, 즉 통치권 같은 것입니다. 이 권위는 당신의 가르침과 행동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관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권위 있게 만드는 것은 이런 언행일치의 모습이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권위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증거를 통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위선적 사목자
“율법학자들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율법학자들의 이런 태도를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목적 정신분열증(pastoral schizophrenia)’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다양한 모습으로 복음에 나타납니다.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고, 아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언급만 하고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이런 언행불일치와 정신분열증세를 규정하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는 단어는‘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위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양식입니다. 사목적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들은 그들이 주님과 같을 수 없고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순종하고 관대하게 그들을 받아줍니다. 많은 사목자들이 위선적이고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그들을 존중해 줍니다.”
언행불일치의 그리스도인
“아량이 아주 넓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은총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인 사무엘기 상권 나오는 老사제 엘리는 기름부음의 은사만 남고 모든 권위를 잃었습니다. 그 은사로 엘리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아들 하나를 청하는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기적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은 인간의 권위와 기름부음의 은사를 구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해성사 중에 자기들이 하는 고백이 뒤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학자들처럼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많은 사목자들을 언제고 관대하게 받아주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비신앙인과 다르지 않게 사는 신자들의 생활태도를 알면서도 너그럽게 품어줍니다. 사람들은 가식적 행동이나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봅니다. 증거하는 삶을 살지 않는 형식적 신자나, 언행이 다르고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이 증거자적 삶을 살지 않는 사목자들은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 모두가 그 권위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 권위는 명령하거나 자기 말을 듣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대로 실행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이 가시는 길에 동행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14 January 2020, 13:48, 번역 장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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