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해서 얻은 신앙이 아니다. 지루하고 긴 조과, 만과를 바치던 어린 시절엔 “어째서 나는 이런 짓을 해야 할까”라는 불경스런 저항을 차마 하지 못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 모질기도 했다. 머릿속에 쌓인 생각의 찌꺼기들, 그 쓰레기더미 사이사이 흉측하게 갈라진 틈으로 잡념이 스미기 시작했다. 의무축일 준수가 번거롭게 느껴지는 것을 시작으로, 꽤나 긴 세월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 시달렸다. 이중적 신앙인의 가면을 쓰고도 피로 얽힌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차피 내 뜻에 따라 받은 생명도 아니다. 경륜이 거저 준 지혜라고 해야 하나?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바라는 대로 꾸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를 터득한 것은 참으로 오래전 일이다. 나이 먹어가는 나를 더 어려운 곳으로 이끄는 것이 있다. 예정된 운명이라 믿고 싶은 유혹에 도리 없이 끌려가며 굴복하고 싶은 체념이다. ‘예정조화’가 ‘反敎義’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삶의 무게가 이마저도 분간해낼 여유를 빼앗아간다.
버려진 생각의 퇴적층이 내일의 視界를 가로 막는다. 오늘의 언덕에서 어제를 바라본다. 뒤돌아 멀리 내 생명의 시작을 더듬는다. 탯줄의 끝에 달린 그 무엇을 찾아낸다. 목숨과 동시에 내 뼛속과 내 피안에 새겨진 因子를 본다. 평생을 따라 다니며 붙어있던 딱지가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떼어낼 수 없는 인호(印號), 하느님의 도장, 성령의 표지, 내 삶의 출발은 축복의 범벅이었다, 그 큰 행운이 자랑스럽다.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아름다운 설교입니다.” 그것은 “아기들의 합창!” 기억에 새겨지지도 않은 내 세례를 교황님이 축하하신다.
유아세례를 집전한 교황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봉헌된 「주님 세례 축일」 미사 중에 32명의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유아세례식은 오랜 전통에 따른 것으로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에 거행되어 왔다. 이날 세례를 받은 유아들은 바티칸 직원들과 교황청에 파견된 외교관의 자녀들로 작년에 태어난 아기들이다.
유아세례의 당위성
교황은 강론을 통해 유아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세례를 받으러 갔을 때 요한이 한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신 내용을 상기시킨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 사람들이 받는 것은 보물과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받는 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아기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아기의 안으로 들어가시어 당신의 힘으로 아기를 양육하십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아기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아기들을 힘입어 신앙의 정신에 따라 교리를 가르치고 보살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덕을 자라나게 하고 성령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설교
교황은 또한 젊은 부부들에게 자신의 사목적 견해를 밝혔다. “예식 중에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에게는 시스티나 성당이 어색할 것입니다. 실은 오늘 처음 왔습니다. 아기들이 울기 시작하면 달래려고 애쓰지만 걱정하지 말고 그냥 두셔도 됩니다. 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가 동참하고 결국 모두 함께 울면서 ‘아기들의 합창’을 만들어냅니다.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아름다운 설교입니다. 여러분은 이 아기들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출처: Vatican News, 12 January 2020, 11:19, 번역 장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