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영적 유언

MonteLuca12 2023. 1. 5. 19:18

성탄과 연말 사이에, 이편저편 몰아 인사드리기 위해 만든 식사 자리였다. 외롭고 허망할 것 같은 은퇴가 활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출발이라 우기는 억지를, 더는 허언이라 나무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멀댄다.

 

오늘따라 시간이 퍽이나 빨리 흘러간다. 음식을 자시는 것보다, 그동안 겪은 일을 알리는 재미가, 그간에 느낀 소감을 전하는 기쁨이 그분에게는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만남도 헤어짐도 무감각하리만치 반복되어 온 일상사이고, 어간에 묻힌 정서가 절대로 낯선 것이 아니건만 마음을 나누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새롭다.

 

추기경님과 나눈 긴 대화를 얼마 남지 않은 메모리를 쥐어짜 채워 넣었다. 그 말머리에 커다랗게 새긴 글귀를 베네딕토 교황님의 유언 앞에 붙이고 싶다.

 

“Ubi amor, ibi oculus!”

“사랑이 있는 곳으로 눈길이 간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사임을 선언하시기 6년도 더 전에 영적 유언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그 유언은 선종하신 당일 공개되었다. 길지 않은 간결하고 쉬운 문장에 담긴 교황님의 마음이 자꾸만 코를 훌쩍거리게 만든다.

 

교황청은 2006년 8월 29일 자로 작성된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의 영적 유언을 공개했다.

 

 

제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 다다라, 방황하며 지나온 수십 년의 세월을 돌이켜봅니다. 무엇보다 감사해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됩니다. 특히 헤아릴 수 없이 좋은 선물을 많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생명을 주셨고 온갖 혼란 속에서도 언제나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넘어지려 할 때마다 언제나 일으키시어 당신 얼굴의 밝은 빛으로 저를 비추어 주셨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 길의 어둡고 험난한 구간조차도 저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허둥대며 그 구간을 지나던 저를 하느님께서 잘 인도해 주셨기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어려운 시기에 저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제가 살아올 수 있도록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제가 살아온 날들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추어 준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오늘도 저를 비추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현명하고 굳은 믿음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신앙은 저의 모든 과학적 지식의 한가운데 확고한 지침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신심과 친절하고 온유한 심성은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을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제게 남아 있습니다. 제 누이는 수십 년 동안 저의 모든 것을 챙겨주고 헌신적으로 저를 돌봐주었습니다. 제 동생은 명석한 판단력과 단호한 결단력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을 닦아주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조언과 동행이 없었다면 저는 올바른 길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항상 제 곁에 함께 머물도록 많은 친구와 이웃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제 인생 여정의 모든 굽이마다 함께할 동반자와 협력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선생님과 제자들도 정해주셨습니다.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 모두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주님께서 바이에른 알프스 산기슭에 저의 아름다운 집을 마련해주신 은혜에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광채가 찬란히 빛나는 광경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신앙의 아름다움을 되풀이해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조국의 동포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저의 조국이 끝까지 하느님을 믿는 나라로 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제 인생 여정의 여러 단계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모든 아름다움, 특히 로마와 제 두 번째 고향이 된 이탈리아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기억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제가 잘못을 저지른 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앞서 제 동포들에게 드렸던 말씀을,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제게 맡겨진 분들에게 똑같이 드립니다. 믿음 안에 굳건하게 서 계십시오! 절대로 혼동하지 마십시오! 종종 과학은 가톨릭 신앙과 대립하는, 반박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과학이란 자연과학일 수도 있고 역사적 연구의 결과, 특히 성서의 주해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과학의 변화를 목격해 왔습니다. 그와 함께 신앙에 대한 명백한 확신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철학적 해석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자연과학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신앙이 자신의 확증 범위의 한계와 그에 따른 특수성을 이해하게 된 점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60년 동안 저는 신학, 특히 성서를 연구하는 데 제 삶을 바쳤습니다. 여러 세대를 걸쳐오면서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이론들이 변화하는 세대와 함께 무너지고 단지 가설로 판명되는 사례를 보아 왔습니다. 하르나크와 율리허가 주창한 자유주의 신학, 볼트만으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신학, 마르크스주의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저는 믿음의 합리성이 가설의 혼돈을 어떻게 뚫고 나오는지를 관찰했고 이를 통해 신앙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진리를 굳게 믿습니다. 온갖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진정한 그분의 몸입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와 결점을 용서하시고 저를 당신의 영원한 거처에 받아주시도록 빌어주십시오. 제게 맡겨진 모든 이들을 위해 바치는 저의 진심 어린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31 December 2022, 19:58, 번역 장주영

The Spiritual Testament of Pope Emeritus Benedict XVI - Vatican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