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 사는 모습이 그랬나보다. 그래도 지금 같기야 했을까 싶다. “가까운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속담이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어버렸다.
웹의 검색 기능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새카맣게 손때가 뭍은 사전을 너덜너덜 해지도록 뒤적거리며 공부했다는 자랑질을 이제는 깊이 묻어버렸다. 어머니의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도 이처럼 보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촌수(寸數)를 밝혀내지 못하고 남남처럼 갈라져 사는 친척이 수두룩하게 쌓여간다. 혈연이 끊기고 일가(一家)는 잘게 쪼개졌다. 촌수 계산은 계수 감각에 역행하고 그 의미는 증발해서 얼마 남지 않았다. 만의 하나 길에서 스쳐 지날 경우가 생기더라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족보를 훑어 밝혀주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느끼는 답답함이, 면벽(面壁)의 갑갑증만큼이나 무겁다.
군중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반문(反問)도 그런 뜻이었을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마르 3, 33) 핏줄로 맺어진 인연이 가치 없는 것이라 이르신 말씀이 아닐 것이다. 천륜을 뛰어넘는 진리를 설파하셨을 리도 만무하다. 자주 만나는 이웃들이, 가족과 나누어 차지한 내 삶의 면적을 계산해 본다. 바벨탑에서 뒤섞인 세상의 언어를 다시 합해주신 분을 만났다. 어느 부분에선가 끊어졌던 연줄을 그분께서 다시 묶어주신다.
보은과 감사의 시기, 사랑의 계절이 지나고 있다. 누군가가 보내준 ‘성령칠은 뽑기’ 어플리케이션에서 나온 은사가 ‘용기’다. 하느님의 ‘점괘’가 신통하다. 감사와 사랑, 용서와 겸손 모두 용기에서 솟아나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성령의 숨결이 오월의 꽃향기 속에 흠뻑 스며있다.
성령께 마음을 여십시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령강림대축일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강론을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최고의 선물’, ‘선물 중의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이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지칭해 사용한 신비스러운 의미를 가진 단어 ‘빠라끌리또(Paraclito)’를 정확히 옮기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이 단어는 본질적으로 ‘위로자’와 ‘협조자’(혹은 변호인)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위로자’인 성령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면 우리는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위로는 지속성이 없는 즉각적이고 현세적인 것입니다. 상처의 치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아픔을 진정시키는 ‘진통제’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감각적으로 사랑을 느끼게 할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분,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시는 성령은 우리가 받는 위안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둠과 고통,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성령께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세상은 일이 잘되면 우리를 칭찬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우리를 비난하고, 적대적인 영인 마귀의 방식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경험했던 것을 보고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나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약점이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위로해주시고 지원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받은 위로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증언하고자 나섰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증언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빠라끌리또’, 즉 ‘위로자’가 되어, 성령께서 가져다주신 위안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단지 듣기 좋은 말을 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 다른 이들 곁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그 사명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그분의 자비를 증거해야 합니다.”
‘협조자’이신 성령
교황은 강론의 두 번째 핵심 포인트인 ‘협조자’로서의 성령에 관한 설명을 이어간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켜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권유하실 뿐이지 강요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반면 속임수의 영인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여 굴복시키려 합니다.”
교황은 이런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세 가지 해결책을 성령께서 주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게 살라는 성령의 권고입니다. 과거의 실수에 묶여 있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얼어붙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우리의 삶을 선물로 만드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체를 바라보라고 일러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생각하고,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교회의 안목을 가지고 보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획일화되지 않은 통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그 안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분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다양한 생각과 비전을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아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공동체에 우선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개인적인 차이를 넘어서서 통합, 일치, 다양성의 조화라는 소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께 마음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생각하기 전에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다양한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워 주님께서 머무르실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고, 성령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는 자신의 계획과 사업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인간적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보며 이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황은 성령께 바치는 기도로 강론을 마무리한다. “우리의 ‘협조자’이신 성령님, 당신께서는 우리 ‘영혼의 변호인’이시며 ‘마음의 달콤한 손님’이십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도록 인도해주소서. 교회와 인간의 일치를 알리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게 하소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의 은총에 힘입어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이끌어주소서.”
출처: Vatican News, 23 May 2021, 10:50, 번역 장주영
'교황님의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6월의 기도지향 (0) | 2021.06.07 |
---|---|
전 세계가 함께 바친 기도 (0) | 2021.06.02 |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 (0) | 2021.05.21 |
2021년 5월의 기도지향 (0) | 2021.05.06 |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바치는 묵주기도 (0) | 2021.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