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교황님의 묵상' 전문

MonteLuca12 2020. 3. 28. 23:23

전대사를 받은 것이 염치없다. 잠을 조금 밑졌다고 챙기기엔 뭔가 꺼림칙하다. ‘그리스도와 성인들께서 쌓아 놓으신 공로의 보고(寶庫)’를 곁다리로 축낸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랑채에서 더부살이하며 눈칫밥 먹는 머슴처럼, 그 큰 시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책이 가슴을 휘젓는다. 마스크로 가린 것은 입만이 아님을 안다. 오로지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손을 모은다.

 

비 내리는 계단을 오르시는 교황님의 걸음이 유난히 애처롭다. 광화문광장 코밑에서 뵈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십자가를 지신 듯, 세상의 고통이 무겁게 어르신을 짓누르고 있다. 염치 타령보다는 ‘공로의 곳간’을 채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는다.

 

잠시 눈 붙이고 제일 먼저 만난 교황님의 묵상 전문을 하루 종일 붙들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더 미루고 싶지 않은 욕심에 여기에 올린다.

 

[역자 주] 아래의 '교황님 묵상'은 영문 텍스트의 번역입니다. 중계 영상의 우리말 통역을 참고했다는 점을 밝힙니다.

 

 

특별 「우르비 엣 오르비」 축복

 

「인류를 위한 특별 전례」 교황의 묵상 전문
 
프란치스코 교황은 금요일 저녁,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거행된 특별전례를 집전하면서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마르코 복음의 내용을 주제로 묵상을 인도했다. 묵상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날 저녁이 되자”(마르 4, 25) 우리가 조금 전 들은 복음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몇 주 전부터 저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짙은 어두움이 우리 광장과 길거리와 도시를 덮고 있고, 우리의 삶은 모두가 청각장애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침묵과 고통스러운 공허감 속에 짓눌려 있습니다. 지나치는 모든 것이 마비되어 멈춰버렸습니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는 숨 쉬는 공기 속에서조차 느껴지고, 사람들의 몸짓 안에도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빛이 이를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빠져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거센 파도 때문에 놀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연약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두가 같이 노를 저어야 하고, 서로 격려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중요하고도 절실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같은 배 위에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올라타고 있습니다. 한 목소리로 죽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만 할 수 없고, 모두가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낙담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의 제일 뒤쪽 고물에 계셨습니다. 그 부분은 제일 먼저 물에 가라앉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배에 물이 가득 찬 와중에서도 베개를 베고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무시는 장면이 나오는 대목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바람과 물결을 멎게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꾸짖는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40절)
 
예수님을 이해하도록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믿음과 달리 제자들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주님을 불러서 깨웠습니다. 어떻게 깨웠습니까?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38절) 저희가 어떻게 되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관심이 없어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끼리, 혹은 가족들 사이에서 “제게는 아무 관심도 없나요?”라는 말을 듣는 것은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 돌풍이 일게 만드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흔들리셨을 겁니다. 그분보다 더 우리를 걱정하는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름을 부르자마자 예수님은 낙담한 제자들을 구해주십니다.
 
돌풍은 우리의 취약점이라는 가면을 벗기고 거짓되고 과장된 자만심의 민낯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과 계획하는 일들, 습관과 우리가 정해놓은 우선순위가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영양분을 공급하여 지탱해주고 강화시키는 것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어 둔해지고 약해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돌풍은 입증해줍니다. 또한 우리 백성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을 잊어버리고 겉포장하려는 온갖 시도들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막연히 구원될 것이라 믿는 생각과 행위를 통하여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들은, 우리의 뿌리와 연결지어, 선조들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역경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면역력마저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갑니다.
 
돌풍이 불면 언제나 자아에 가면을 씌우고 있던 상투적인 화장이 지워집니다. 자기 자신만을 걱정하는 우리의 자아입니다. 그리고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복된 공동의 소속감이, 형제자매로서의 소속감이 드러나도록 한 번 더 껍질을 벗겨줍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주님 오늘 저녁 당신의 말씀은 저희 마음을 울리고 저희 모두의 가슴에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저희보다 당신께서 더 사랑하시는 이 세상 안에서 저희는 강한 척, 마치 불가능이 없는 듯 전속력으로 달려왔습니다. 이익을 탐하며 세상사에 휘말리고 서두르다가 방향을 잃고 끌려 다녔습니다. 당신께서 경고하실 때 저희는 멈추지 않았고, 전쟁과 세상을 뒤덮은 불의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가난한 이들과 깊게 병든 우리 지구가 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병든 세상을 개의치 않고 언제나 건강하게 살 것이라 생각하면서 계속 달려왔습니다. 이제 파도치는 바다에서 당신께 간절히 청합니다. 잠에서 깨십시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주님, 이 말씀이 저희에게 하시는 것임을 압니다. 믿음을 가지라는 질책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이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당신께로 다가와 의지하라는 뜻임을 압니다. 이 사순 시기에 “회개하여라!”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 12)라는 당신의 긴급한 호소가 울려 퍼집니다. 이 시련의 시기를 선택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도록 저희를 불러주십시오. 당신께서 심판하시는 시간이 아니라, 저희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지나가는 것인지 선택하고,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갈라내는 판단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주님, 당신을 따르고 이웃을 위한 삶의 괘도로 다시 진입하는 시기입니다. 저희는 인생여정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목숨을 바쳐 응답한 수많은 길벗들의 모범을 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용감하고 관대한 헌신 안에 채워서 빚어내신 활력입니다. 우리의 삶이 평범한 사람들로 엮여져있고 그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삶이 가치를 가지게 만드는 것은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들은 신문이나 잡지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최신의 쇼프로그램이나 거창한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의사, 간호사, 마트의 직원, 미화원, 간병인, 운송서비스 종사자, 사법 및 치안 당국자, 자원봉사자, 사제, 수도자,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혼자서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백성들의 진정한 발전을 다시 평가하게 만드는 너무나 많은 고통 앞에서 저희는 예수님께서 바치시는 사제의 기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일매일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공포심 대신에 공동책임의 씨를 뿌리려 애쓰면서 희망을 나누어주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선생님들이 일상의 작은 몸짓으로 위기를 감당하고 헤쳐 나가는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분들은 몸에 밴 일상을 조정하고 시선을 들어 올려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고 봉헌하며 전구를 청합니다. 기도와 조용한 봉사는 우리가 승리하도록 돕는 무기들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믿음의 시작은 우리가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자서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옛날 항해사들에게 별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주님을 모십시다. 우리의 두려움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분께서 물리치시게 합시다. 제자들처럼 그분과 함께 있으면 조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 추악한 일들조차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돌풍을 잠재우고 고요를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생명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폭풍우 속에서 우리를 다시 깨어나게 하시고 모든 것이 엉망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때에 용기와 도움을 주고 이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연대하고 희망을 전하는 일을 실천하도록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부활신앙을 살려내시기 위해 잠에서 깨십니다. 우리에게는 닻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구원되었습니다. 우리는 키도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속량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치유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도록 그분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격리된 채, 따뜻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서로 만나지 못하는 고통과, 많은 것이 부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 번 더 우리에게 울려오는 구원의 선포를 들읍시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우리 곁에 살아계시다는 구원의 선포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재발견하고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깃든 은총을 깨닫고 든든히 보존하여 더욱 키워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마십시오.”(이사 42, 3 참조) 불꽃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의 불이 다시 타오르도록 치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품에 안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감도에 따라서만 얻을 수 있는 창의성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능력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잠시 접어두고 현재의 온갖 어려움을 끌어안을 용기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불림 받았음을 느낄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찾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환대와 형제애와 연대를 채워 넣읍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 희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화하고 유지시켜야 합니다. 희망을 품기 위하여 주님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희망을 주는 믿음의 힘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 사도의 바위 같이 굳은 믿음을 상징하는 이 자리에서, 오늘 저녁 저는, 당신 백성의 안위이시며 폭풍우가 일고 있는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여러분 모두를 주님께 맡겨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와 온 세상을 품는 이 기둥들로부터 위로의 포옹처럼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내리시기를 빕니다. 주님, 이 세상을 축복하시고 육신의 건강을 주시며 마음의 위안을 주십시오. 저희에게 겁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믿음이 약하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를 돌풍의 회오리 속에 버려두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 5)고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베드로와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를 돌보시니 모든 걱정을 당신께 맡깁니다. (1베드 5, 7)

출처: Vatican News, 27 March 2020, 20:08, 번역 장주영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20-03/urbi-et-orbi-pope-coronavirus-prayer-blessin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