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교황청의 대림시기 특강

MonteLuca12 2021. 12. 23. 10:51

원 없이 낙엽을 밟았다. 탯줄을 떼고 나서부터 여태껏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낙엽을 올가을에 만났다. 오늘은 그 낙엽의 얼굴이 맛만 보여준 눈에 살짝 덮였다. 부서지며 내는 낙엽의 애절한 신음과 서설(瑞雪)의 상쾌한 아침인사가 고요한 계곡의 아침을 깨운다.

 

장맛비를 흉내질하던 봄비의 심술 때문에 온 산등성에 눈처럼 뿌려졌던 벚꽃 잎의 향연이 그 위에 겹친다. 우산 위를 수두룩하게 덮고, 신발 코와 옆구리를 띄엄띄엄 수놓았던 꽃잎은, 그깟 봄비의 허세에 굴복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나 보다. 양말에 흠뻑 스며든 빗물을 짜낼 양으로 고가 밑 노숙인들의 자리를 빌려 엉덩이를 걸칠 때까지 풀로 붙인 이름표처럼 예까지 따라왔다.

 

이임미사를 며칠 앞둔 추기경님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어깨에 이야기보따리를 걸머메고 나오셨다. 편안해 뵈는 모습에서 꽤 오랜만에 느끼는 정감이 듬뿍 묻어난다. 켜켜이 쌓인 추억더미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동요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 노랫말을 지은이의 시를 어찌나 술술 외우셨는지 도저히 따라할 수 없지만 그 시구의 핵심단어는 낙엽과 꽃이었다. 가을에 피는 ‘꽃’, 쌓이고 또 쌓여 무릎까지 빠지는 ‘꽃밭’을 걷던 산길이, 우리 앞에 놓인 반찬그릇 사이로 휘돌아 나간다.

 

가을이 때를 넘어 봄과 겹치고, 끝이 한 바퀴 돌아 시작으로 연결된다. 회한이 희망으로 바뀌는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매년 돌아오는 성탄의 진의(眞意)도 습관과 형식에 묻혀버렸다. 성탄의 코밑에서 ‘성탄’의 의미를 생각한다. ‘영적 낙태’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섬뜩하다. 내일 그분이 오신다.

 

“교회는 우리의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 합니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Raniero Cantalamessa) 추기경은 교황과 교황청의 관료들을 대상으로 세 번째 대림시기 특강을 진행했다. 이번 대림특강에서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해 설명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추기경이 인용한 성구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 따온 것이다. 추기경은 특히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다"라는 문구가 가지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다.
 
추기경은 교부들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만일 성경의 이 문구가 없었다면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단들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천상적 존재일 뿐, 육체가 없는 환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사라지신 분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역자 주] 가현설 (假現說; 라틴어 Docetismus; 영어 Docetism): 초대 교회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주장으로, 성자께서 참으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겉모습으로만 인성을 취하셨다는 설. 곧 그리스도의 인성과 수난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설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천주교 용어집)
 
‘여인에게서’, 즉 ‘여인의 육체’에서 태어났다는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명확한 증거라고 추기경은 말한다. 일찍이 레오 1세 교황은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한 몸 안에 함께 지닌 참 하느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마리아, 교회, 영혼'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마리아를 ‘여인’으로 언급한 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성경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말한다. 이 표현은 창세기의 하와에서 시작하여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신 여인"이라는 요한 묵시록의 말씀까지 이어지는데, 요한 묵시록에 묘사된 ‘여인’은 분명하게 교회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추기경은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카나의 혼인잔치와 골고타에서 예수님이 성모님에 관해 언급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교부들이 교회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모습을 밀접하게 연결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이유로 인해 성경이 말하는 한 가지는 다른 두 가지에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교회를 동정녀이고 어머니라고 말한 부분은 특히 동정 마리아를 말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느 모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말씀의 신부, 그리스도의 어머니, 누이 동정녀, 풍요의 어머니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서 아홉 달 동안 머무르셨고, 그분께서는 세세 대대로 충실한 영혼의 이해와 사랑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스텔라의 이사악, 「설교」(Sermo) 51)
 
[역자 주] 스텔라의 이사악 복자의 설교집에 나오는 이 말씀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 제 285항에 인용되었다.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교회
 
따라서 마리아가 태중에 예수님을 잉태하고 세상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낳으신 것처럼 교회는 모든 시대의 인류를 위해 예수님을 탄생시켜야 한다고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말했다. 누구든지 교회를 보는데서 시선을 멈추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교회의 자기 성찰적인 몸부림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두 분 교황님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신 주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 구원의 메시지를 교회에 맡기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실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다고 덧붙인다.
 
교회 안에는 여전히 위험과 ‘분열의 벽’이 숨어 있다고 추기경은 지적한다. 지나친 관료주의, 무의미한 예식과 제의(祭衣), 낡은 율법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지금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은 논쟁거리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한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교회가 이 세상의 모든 ‘실존적 소외계층’(existential peripheries)에게 다가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독려한 조치에 대한 감사였다.

[역자 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9년 12월 16일 아침미사 강론에서 사용하신 용어로 적절한 우리말 번역 예를 찾지 못하여 역자의 임의로 선택한 우리말임을 밝힌다. 교황님은 이 용어를 억압받는 이들, 굶주린 이들, 옥에 갇힌 이들, 외국인, 고아와 배우자를 잃고 홀로된 이들, 조국을 떠난 이들을 통칭하기 위해 사용하셨다.
 
우리 마음의 성탄
 
동시에, 그리스도인 각자는 모두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 한다고 추기경은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방법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 21) 두 가지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이 두 가지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첫 번째는 그분을 잉태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낳으신 것입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두 가지 형태의 ‘영적 낙태’에 대해 경고한다.
 
“하나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낳을 생각은 하지 않고 품고만 있는 것입니다. 즉, 말씀은 받아들이면서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체외수정을 한 것처럼 잉태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런 사람들은 친절이나 하느님의 사랑, 심지어 바른 의도에 의한 동기부여 없이도 많은 선행을 합니다. 습관이나 위선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의 행위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경우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고 신앙 안에서 실천할 경우에만 선한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침묵하는 가운데
 
그런 이유로 마음속에 잉태된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추기경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결심이나 다짐은 지체 없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과 습관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외부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태중에 계실뿐 탄생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영적 낙태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는 강조해서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과 우리 내면에 작은 침묵의 여백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세상에 오시는 그분의 성탄을 침묵 가운데 조용히 묵상하며 맞이해야 합니다.”
 
[역자 주]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인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추기경은 카푸친 작은형제회 (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 약칭: O.F.M. Cap.) 출신으로, 작년 11월 28일 신부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지역교회의 대주교로 구성되는 ‘사제추기경’에 비해 사제에서 서임된 추기경은 ‘부제추기경’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일로 추기경에 승격되는 자격은 적어도 사제품을 받아야 하고, 학식과 품행, 신심과 현명한 업무처리 역량이 특출한 남자라야 한다. 교황이 자유로이 선발하며, 아직 주교가 아닌 이들은 추기경으로 서임되면 주교 서품을 받아야 한다. (본 블로그 제752화 참조, 2021년 3월 3일)
 

출처: Vatican News, 17 December 2021, 11:06, 번역 장주영

Cardinal Cantalamessa: Church must bear Christ for our world - Vatican News

'교황님의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년(聖年)  (0) 2022.01.14
2022년 1월의 기도지향  (0) 2022.01.05
‘시노달리타스’  (0) 2021.12.07
2021년 12월의 기도지향  (0) 2021.12.01
2021년 11월의 기도지향  (0) 2021.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