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인간이 하는 짓”이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실수를 하게끔 만들어진 피조물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당연히 하느님과 대별되는 개념이다. 염치도 좋게 거기서 위안을 얻는다. 내 실수는 남들이 너그럽게 덮어주기를 바란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내가 스스로 생산한 그 관대함은 주체가 바뀐 것을 상관하지 않고 내 것이 된다. 그렇게 뻔뻔해진 얼굴을 들고 내 입으로 비난할 다른 얼굴을 찾는다.
자주하는 후회지만 특별히 직전 상황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 때가 있다. 말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몰려오는 난감함은, 후회라는 감정을 여러 기관을 통해 느끼게 해준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나를, 내가 용서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스쳐간다.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엮어내려 간다. 담아내는 이야기의 모습이 다양해졌다. 그것을 쌓아두고 분류하는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풀어내는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 4개월 남은 홍보주일의 담화문을 발표하신 교황님의 생각이다. 금년 홍보주일은 주님승천대축일인 5월 24일이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속에는 늘 작은 뼈가 숨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소소한 삶의 지혜였다. 소박하고 잔잔해 우습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현란하고 소란스런 ‘스토리텔링’보다 내게는 더 친숙하다.
[교황의 제54차 홍보주일 담화문에 관하여 교황청 홍보처장이 기고한 사설]
역사의 의미와 그것이 말하는 것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말과 메시지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 자신과 주변의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구속(救贖)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압니다.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선행이 무엇인지 알고 틈을 남겨둡니다.”
교황은 제54차 홍보주일 담화문의 시작과 끝, 두 문장에서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제기해온 주제의 본질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나침반도 없고 북극성의 위치도 못 찾는 상태에서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릴 위험에 놓여있다. 의사소통의 시대에 살면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역설적인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빅데이터’와 같이 거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인간사의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역사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다(to narrate)’라는 동사는 라틴어 ‘gnarus’에서 나왔다. 이 말은 ‘겪다’, ‘경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험을 연결해 묶는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지혜나 지식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의미 없는 것들의 목록에 기록되고 말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의 의미
눈으로 봐서 한 번에 알 수 없는 것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만 숨겨져 있던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되는 법이다. 무엇이든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시간과 지식이 필요하다.
교황이 담화문을 통해 강사들이나 언론인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내용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교황의 이 담화는 그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일반인들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우리 모두가 의사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들에게 들려주는 세상의 이야기에 대하여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없다. 그 이야기들은 글과 말, 그리고 영상으로 보존되고 전달된다. 단어로 엮어지고 이미지 형태로 바뀌고 음악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는 우리 과거의 기억일 뿐 아니라 미래의 비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물려주는 우리의 삶
교황은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했는지,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담은 이야기인지,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진실하고 생동감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거짓이거나 돌처럼 굳어버린 이야기입니까? 인간미가 넘치고 신비로 가득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인간성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까? 선한 것입니까, 아니면 악한 이야기입니까? 희망을 열어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좌절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까? 그 이야기는 죄악을 이끌어 들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이야기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선의 불빛을 찾는 것입니까?”
어떤 이야기든 모두 결말에 가서야 완전하게 이해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 하느님의 신비인 구속의 가능성을 위해 어떤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하겠는가?
이야기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교황은 자신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의 훌륭한 현인들의 말씀이 넘쳐나는 정보의 소음과 혼란 속에 들리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중략) 자기 성찰, 대화, 사람들과 편견 없는 만남의 결실인 참된 지혜는 단순히 자료 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료의 축적은 결국 과부하와 혼란을 일으켜 일종의 정신적 오염을 낳습니다. (제47항)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오해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책임의식을 불어넣기도 반대로 해이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래의 정체성을 길러주기도 하고 시들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하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우리의 여정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바꾼 사건을 알고 있는 신앙인들이기에 이 여정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신비를 확실하게 믿기 때문이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우리의 혼란스런 삶 속에서 지혜를 잃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의 신비라는 것을 직감한 그들은 처음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을 따라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꿈에서 받고 그 말을 따른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역사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 둘 다를 위한 것이었다.
역사의 감각과 이야기를 모두 보존할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면, 세 명의 동방박사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다시 시작하려면 새로운 길, 새로운 역사가 필요하다. 다른 시각으로 보고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야 하며 기억하는 것도 새로워져야 한다. 미래를 설계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도 새롭게 변해야 한다.
출처: Vatican News, 24 January 2020, 17:05, 번역 장주영
'교황님의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인도 교회의 미래 (0) | 2020.02.01 |
---|---|
신앙의 기쁨 (0) | 2020.01.30 |
교황님의 '설' 인사 (0) | 2020.01.25 |
환대와 人情 (0) | 2020.01.24 |
침묵의 가치 (0) | 2020.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