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묵상

2021년 사순시기 교황 담화

MonteLuca12 2021. 2. 16. 10:06

동산의 산책길은 자주 모습을 바꾼다. 쌓였던 눈이 녹아내려 질퍽해진 땅은 부지런히 찾아오는 발자국에 묻어나 금세 꾸덕꾸덕해진다. 물기를 안으로 머금고 조금씩 밝은 옷으로 갈아입나 싶은데, 어느새 그 길은 통밀 가루 같은 흙먼지를 뒤집어쓴다. 바지 끝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신발에도 잔뜩 들러붙어 여기까지 따라왔다. 몇 번의 발 구름에 털렸을 것이라 믿는 내 눈을 속이고 끝내는 현관까지 따라 와 우리 집에 같이 산다.

 

날이 차지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거실 깊숙이 파고든다. 치운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새벽녘에 살짝 내린 눈처럼 거실바닥에 뽀얗게 깔린 것이 먼지다. 검은 휘장으로 창문을 모두 가린 강당 안의 어둠을 가르던 환등기 빛의 터널이 생각난다. 그 속을 가득 메웠던 먼지는 한여름 밤 숲속의 하루살이 떼보다 더 빼곡했다. 성당 아랫터에 자리 잡았던 콘센트 막사에서, 나는 슬라이드 영상을 보며 재미있는 구약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흙에서 나와 먼지를 숨쉬며 산다. 생명을 품고 죽음이 깃들이는 곳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신비를 생각하는 때가 돌아왔다. 어쭙잖은 ‘인생소출’ 때문에 조바심이 나고 마음이 탄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가슴이 재가 된다. 금년에는 ‘재의 예식’이 코로나의 벽을 뚫었다.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시기의 문턱을 넘는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십시오!”

 

아래에 옮겨 붙이는 글은 지난 12일 영문판 ‘Vatican News’에 실린 기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1년 사순 시기 담화’ 공식 번역문(全文)이 이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기사의 내용이 대부분 담화를 부분적으로 직접 인용한 것이기에, 공식적으로 번역된 우리말 담화를 자구수정 없이 여기에 따왔음을 밝힙니다. (청색 이탤릭체로 표기된 부분)

 

포스터 출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문헌마당-알림-소식]

2021년 사순시기 교황 담화
 
“믿음, 희망, 사랑의 쇄신을 위한 때”
 
교황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희망의 ‘생수’를 길어 올리십시오.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교황의 2021년 사순시기 담화는 주님께 대한 ‘세 가지 덕’(向主三德)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교황은 파스카 신비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번 사순 여정은, 그리스도인 삶의 순례 여정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생각과 태도와 결정에 영감을 주는 부활의 빛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통한 회심의 여정인 사순시기가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믿음, 살아있는 희망, 효과적인 자선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라고 강조한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증거하도록 촉구하는 믿음
 
“이번 사순 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세세대대로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연다는 의미입니다.”
 
“극기의 한 형태인 단식은 단순한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재발견하게 도와주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그분 안에서 충만에 이르는 피조물인 우리의 현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가난의 체험을 받아들임으로써, 단식하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해지고, 주고받는 사랑의 보물을 쌓아갑니다. 이렇게 단식은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와줍니다.”
 
“사순 시기는 믿음의 때입니다. 우리의 삶 안으로 하느님을 환대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함께 사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때입니다.”
 
우리의 여정을 지속하게 해주는 ‘생수’인 희망
 
교황은 ‘희망의 덕’(망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생수’(요한 4, 10)를 주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인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을 마시는 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충만하게 주실 성령,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을 선사해 주시는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위태롭고 불확실해 보이는 요즈음과 같은 시련의 때에 희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시기는 우리가 빈번히 착취해온 당신의 피조물들을 계속해서 끈기 있게 돌보시는 하느님께로 되돌아서는 희망의 시기입니다.” (「찬미받으소서」, 32-33항, 43-44항 참조)
 
“묵상과 침묵 기도를 통하여 희망은 영감이자 내적 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우리의 사명 안에서 마주하는 도전과 선택에 빛을 비춥니다.”
 
“희망으로 사순시기를 보내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고 사흗날에 하느님께 들어 높여지신 그리스도의 희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의 가장 고귀한 표현인 사랑
 
“사랑은 마음의 도약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게 하고 나눔과 친교의 유대를 이루게 합니다.”
 
“‘사회적 사랑’은 사랑의 문명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고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우리의 가족, 친구, 형제자매로 바라보도록 해 줍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랑으로 함께 나누면 결코 고갈되지 않고 생명과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교황은 열왕기에 나오는 렙타 과부의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 마르코 복음의 물고기 다섯 마리 기적을 인용하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서 기쁘고 소박하게 베푸는 자선이 사랑을 배가시킨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전 세계 확산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소외와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을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덕을 통하여 우리는 확신의 말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회심의 여정
 
교황의 사순시기 담화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시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회개와 기도와 가진 것을 나누는 여정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라는 부르심에 힘입어 우리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믿음과 성령의 숨결이 불러일으키는 희망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한없이 샘솟는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출처: Vatican News, 12 February 2021, 12:13, 번역 장주영

www.vaticannews.va/en/pope/news/2021-02/renewing-faith-hope-and-love-pope-francis-lenten-messag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