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odium fidei”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봉헌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미사’를 기억한다. 그 장엄한 전례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로이터통신의 바티칸 특파원, 필립 푸렐라((Philip Pulella) 기자가 로메로 주교의 시성 절차에 관한 질문을 드렸다. 다음은 교황님께서 하신 답변의 일부이다.
“신앙교리성에서 진행되던 그 절차는 이른바 ‘신중을 기한다는 이유로’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제 그 절차가 시성성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절차의 통상적인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청원인들이 어떻게 진행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신속한 진행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웃에 관하여 명하신 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든 박해자들의 신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증오로(in odium fidei) 순교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신학자들이 연구할 주제입니다. 신학자들이 현재 연구 중입니다.”
[출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기내 기자 회견 (2014년 8월 18일) 전문]
“In odium fidei”
생소한 용어를 오늘 다시 만났다. 이 기회에 순교자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과 증거자와의 차이점을 알아본다.
교회법적으로 순교자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순교자 측의 ‘질료적 사실’로 실제로 죽어야 하고 ‘형상적 사실’로 그 죽음이 신앙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증명돼야 한다. 또한 박해자 측의 질료적 사실로 죽인 행위 또는 죽음의 직접 동기가 된 가해행위가 있어야 한다. 형상적 사실로는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um fidei), 적어도 이러한 증오가 주된 동기가 돼 죽게 한 것이 인정돼야 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순교자는 순교자 측과 박해자 측의 질료적, 형상적 순교 사실이 모두 증명된 이들을 지칭한다. 이 중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무명순교자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순교자는 증거자와는 구별된다. 신앙을 증거하다 죽었다 해도 꼭 순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를 비유적으로 ‘땀의 순교자’나 ‘백색 순교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교회법적으로 말하는 순교자와는 다르다. 박해자 측의 질료적, 형상적 사실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출처: 가톨릭신문, 제3110호, 9면, 2018-09-02]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의 순교자, 호안 로이그
스페인 남북전쟁 중에 ‘인 오디움 피데이’(in odium fidei)로 인해 살해된 호안 로이그 디글(Joan Roig y Diggle)이 어제(토요일) 주님의 제단에 봉헌되었다. 이날 시복미사는 바르셀로나 대교구의 후안 호세 오멜라(Juan José Omella y Omella) 추기경이 집전하였는데, 그는 19세의 이 젊은 순교자를 ‘정감이 넘치는 증거자’라고 불렀다.
복자의 반열에 오른 호안 로그이 디글은 스페인 내전 중에 순교한 약 200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이다. 1936년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었던 폭력적인 분쟁 중에 수백 명의 하느님 백성이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um fidei)로 인해 희생당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되었을 뿐 아니라, 수십 명의 성직자와 수녀, 심지어 주교들까지도 순교하였다. 그들의 희생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투철한 영적 생활
1917년 5월 12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호안 로이그 디글은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34년에 가족과 함께 ‘엘 마스노우’(El Masnou)라는 바르셀로나 인근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일하면서 ‘까탈루냐 크리스천 청년 연합회’(Federación de Jóvenes Cristianos de Cataluña)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나중에는 이 단체의 책임자가 된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서도, 청년 호안은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다. 신심활동과 함께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도 앞장섰던 젊은이다.
그를 알고 있는 동료와 성직자들은 호안 로이그 디글이 책임의식이 강한 평신도 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뛰어난 덕목과 맑은 영혼을 지닌 훌륭한 사람으로 투철하고 섬세한 영적인 삶을 지키나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진 젊은이였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저와 함께 계십니다.”
1936년 7월의 종교박해가 일어나면서 그가 책임자로 있던 크리스천 청년 연합회의 회의실이 파괴되고 성당이 불태워졌다. 몇 달 후인 9월 11일 밤, 민병대원 몇 명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이 젊은 ‘하느님의 종’(역자 주: ‘복자’를 지칭)을 끌고 갔다. 그는 끌려가면서 어머니에게 “하느님께서는 저와 함께 계십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불과 몇 시간 후, 호안 로이그 디글은 산타 콜로마 데 그라메네트(Santa Coloma de Gramanet)에 있는 공동묘지로 이송된다. 민병대가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하고 총을 겨누었을 때, 그는 사형집행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총을 쏘던 순간 그가 외친 인생 최후의 말은 "그리스도 왕 만세!"였다.
복자 호안 로이그 디글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크리스천 삶의 본보기
시복미사의 강론에서 오멜라 추기경은 조안 로이그의 증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모두에게 묻는다. “오늘 시복되신 새 복자께서는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어른들에게도 신앙생활의 본보기가 되신 분입니다. 복자의 증거자적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하는 소망을 우리 안에서 일깨웠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너그러움으로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과 기도, 성체성사와 함께하는 삶과 사도적 열정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복음에 더욱 가깝게 이끌어줄 것입니다.”
추기경은 모두에게 과제를 주면서 강론을 마무리한다. “조안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자매들에게 전하기 위해 용감히 나섭시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작은 밀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삶을 우리와 나누기 위하여 항상 우리 곁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07 November 2020, 17:53, 번역 장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