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의 종
일본 정부가 교황님의 호칭을 ‘教皇’(Kyō-kō)으로 결정했다는 기사를 엊그제 전한 바 있다. 일본은 천황의 나라이다. 일본의 헌법은 “천황이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임금을 뜻하는 ‘皇’자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짐작이다.
교황님의 호칭에 관한 기사를 다시 찾아보았다. 2013년 3월 교황 즉위 경축미사 강론에서, 당시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님이 교황을 교종(敎宗)'이라고 호칭했다. 그로 인해 교황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여 호칭에 관한 해설기사가 실렸었다. “교황과 교종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사목자 및 교회 전문가들은 교황은 일본식 표현이고, 교종은 중국식 표현이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천주교를 들여온 한국교회는 한때 중국식 표현과 일본식 호칭을 혼용했다. 「천주성교공과」 등 옛 문헌에 교황을 '교화황(敎化皇)'으로 썼던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교황으로 정착된 것이다.”(가톨릭평화신문 2013. 4. 7. 발행)
그런데, 교황님의 이번 訪日에 맞춰 보도된 Vatican News의 기사는, 그동안 일본에서 사용된 교황님의 호칭이, 가톨릭은 ‘敎王’, 일반적으로는 ‘法王’이라 사용되었다고 밝힌다.
“첫째 사도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교회의 주교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가톨릭 교회의 최고 목자, 주교단의 단장, 바티칸 시국의 으뜸입니다. 「교황청 연감」에는 서방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좌, 로마 관구의 관구장 대주교라는 직위를 더 밝히고 있으며, 교황은 스스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부릅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목, 2001년 8월호, 강대인)
당신 스스로를 지칭하시는 이름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아르헨티나의 어린 예수회원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일찍이 일본에로의 선교파견을 갈망했다. 폐질환을 앓으면서 이루지 못한 꿈이 이제야 이루어졌다고 기뻐하시던 교황님은, 나가사키의 순교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저는 그저 보잘것없는 신앙의 후예이며, 지구 반대편 끝에서 온 어린 예수회원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흉내 내고 싶은 깔끔한 겸손이, 어릴 적에 본 영화의 주인공처럼 오래된 감동을 타고 목 위의 모든 감각을 뒤흔든다. 그 많은 이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교황님의 호칭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다.
“Servus Servorum Dei”
생명의 복음은 우리가 ‘현장병원’이 되기를 촉구한다
교황은 월요일 오후 도쿄돔 경기장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강론을 통해 교황은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가며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황은 산상설교의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 다가오라고 부르시는 초대의 아름다운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다가감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장애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유는,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걱정거리와 경쟁의 악순환에 짓눌리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생산성에 몰두하고 소비지상주의에 빠져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보면, 오로지 그 기준에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 또는 우리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를 평가하거나 규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준은 우리를,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에 대해 서서히 둔감해지게 만들고, 쓸데없고 유한한 가치를 따라가게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교황은 일본의 경제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깨달을 수없는 사회적 변방으로 내몰려 고립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서로를 지원하고 도와주는 곳인 가정과 학교 및 지역 사회가 이익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도한 경쟁으로 침식되고 있는 현상을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안정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순위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교황은 산상설교 직후 “내일의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꼽았다. 이 말씀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일상의 의무와 책임을 외면해도 된다며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고 교황은 말한다. 그것은 당신이 가신 길을 따라서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권유의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 33)
“주님께서는 우리가 내리는 매일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평가해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성공을 추구하려는 아집에 사로잡히거나 매몰되지 않도록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이익이나 소득만을 바라보는 세속적인 자세이고,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현실적으로 우리는 심하게 불행해지고, 그와 같은 관념의 노예가 됩니다. 참으로 조화롭고 인정 있는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저해하는 것입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
“고립되고 밀폐되어 질식 상태에 빠진 ‘나’로부터 탈피하여, 나누고 축복을 빌어주며 소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연과 진정한 애정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형제애와 정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 같은 개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모든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동정심, 관대함과 편안하게 들어주는 삶의 방식을 따르는 지혜와 용기로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모든 이들의 취약하고 소박한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장애가 있거나 노약한 이들, 외국인들, 실수로 잘못을 범한 이들,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이들 모두가 그 대상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맹인, 신체가 마비된 환자, 바리사이, 죄인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도둑을 받아들이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현장병원인 교회공동체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공동체가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고, 항상 화해와 용서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현장병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어 각 사람과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동정심입니다.”
“이런 삶의 생활을 통해 우리가 점차 더 많은 생명을 보호하고 돌보는, 이 사회 안에서 예언자와 같이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25 November 2019, 08:54, 번역 장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