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의 미덕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은, 가을을 맞은 공원 뒷동산을 산책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끔찍한 더위가 어떻게 이렇게 식을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고, 하늘과 구름이 어울려 그려내는 그림이 어찌 이리 고운지 놀랍기만 하다. 머지않아 땅에 묻힐 나뭇잎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양지를 찾아 느긋이 낮잠을 즐기는 어린 고양이가 지가 먼저 갈 세상을 엿보게 이끌어 준다. 정수리를 찌르던 뙤약볕은 아비규환의 느낌을 칠한 어수선한 옷을 입고 광란의 춤을 추었지만, 말랐던 콧속을 자극해 어디선가 물을 끌어오는, 살랑이는 가을바람은 훌쩍대는 불편함마저 쉬이 삼켜버린다.
둘째의 출산을 철저히 대비했다고 믿었건만, 막상 닥치고 보니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당황한 머리가 절제를 못하고 허둥대는데, 참으로 한심하고 놀랄 일이 겹친다. 아이를 여덟이나 낳아 본 노모가 전혀 도움이 안되고 엉뚱한 말씀만 늘어 놓는 것이다. 한밤 중 전화 속에서, 졸린 목소리를 억지로 내미는 동네 산부인과 의사는 성의를 감췄다. 지금까지 다니던 병원을 가보라는 궁색한 '진단'(?)에 기가 콱 막힌다. 이 세상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몇달 전 이사한 동네가 어설퍼, 두 살배기 아들을 안은 늙은 어머니를 마지못해 믿는 척 하고, 촌각을 다투는 둘째의 무사 탄생을 기도하며 가속 페달을 밟는다. 딸을 얻었다는 기쁨보다 인생이 한바탕 연극 같다는 생각에, 슬픔 비슷한 감정이 섞인 웃음을 피식 새벽 별 쪽으로 흘려 보낸다.
회사라는 지독히 이질적 세상에 떠도는, 겁나게 쓴 공기 맛에 질려 바짝 졸아 있는 가슴에, 훈련소 침상의 삼선에 정렬해 원산폭격의 명령을 기다리는 점호의 끔찍한 순간에, 애절하게 떠는 가슴을 후벼파며 밀려왔던 소원이 있다. 그것은 내 눈 앞에 버티고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비정한 인간들의 메마르고 딱딱한 심장 속에, 바늘 끝만큼이라도 동정심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인생의 봄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꿈틀거린다. 가을에 돌아보는 봄이 더 새로웠던 것처럼, 그 끔찍했던 여름이,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 미워질 때 좋은 기억으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하철 역을 향해 걷는 발걸음에 밟히는 것이 은행열매다. 벌써 떨어지고 있다. 정류장에 서있는 내 얼굴로 한줌 훈기가 뿌려진다. 마을버스가 뿜어내는 배기가스 속 그것이 싫지 않다. 나는 지금 가을의 밤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혼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길지 않은 삶이 계속 지나가는 중이다.
동정심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화요일 아침 미사 교황 강론의 핵심은 동정심의 미덕에 관한 것이었다. 교황은 인간의 언어가 무관심의 언어라고 한다면 동정심은 하느님의 언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황청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봉헌된 미사에 참례한 이들에게, 교황은 동정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자고 권고하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무관심에 빠지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를 만나신 예수님에 관한 오늘의 복음 내용이 강론의 소재였다. 과부는 죽은 아들을 장례 지내기 위해 무덤으로 가고 있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동정심을 가지고 살려주셨다는 말을 하지 않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라는 표현을 쓰면서 동정심으로 가득 찬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음의 '렌즈'교황은 부연하여 예수님께서 동정심의 렌즈를 끼고 과부가 겪고 있는 슬픈 마음을 완벽하게 공감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했다. “동정심은 현실을 확실하게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것은 마음의 렌즈와 같아서 우리가 실제를 명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동정심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래서 동정심을 하느님의 언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성경에는 동정심에 관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정녕 내 백성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신 것은 바로 하느님의 동정심 덕분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동정심 가득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동정심은 하느님의 약점이 되는 동시에 그분의 힘이기도 합니다.”
교황은 동정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가 말하는 동정심은 단순한 측은지심이나 감상적 연민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죽어 있는 개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동정심은 이웃이 안고 있는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언어교황은 계속해서 빵 한 덩이를 많게 하신 기적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군중들을 해산시켜 각자 먹을 것을 사오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은 주님이 마음 속으로 화가 났을 것이고, 제자들은 위축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그 제안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들 같이 가엾게 보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한편으로는 동정심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이기적인 태도가 드러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서 타협하지 않고 문제해결을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데, 손도 까딱하지 않고 서둘러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무관심의 언어라고 한다면 동정심은 하느님의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스스로가 “몇 번이나 이웃을 외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동정심의 문을 닫아 걸지는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자기를 향해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우리가 모두 양심성찰을 통하여 이웃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께 의탁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정의의 행위교황은 다시 오늘의 복음을 인용하면서, 주님께서 슬퍼하는 과부에게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구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마음으로 죽은 청년을 되살려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복음사가들은 '돌려주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정의를 따르는 행위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정심은 우리를 진정한 정의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정당하게 속해 있는 것은 언제든지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기심과 무관심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지 않도록 애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우리가 서로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심입니다.”
출처: Vatican News, 17 September 2019, 13:44, 번역 장주영